[세상의 눈] 성낙수 시인

함께하는 충북도민원탁회의함께하는 충북 범도민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함께하는 충북도민원탁회의’가 28일 청주M컨벤션웨딩홀에서 ‘도민이 행복한 충북 어떻게 만들까요?’란 주제로 열리고 있다. / 김용수
함께하는 충북도민원탁회의함께하는 충북 범도민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함께하는 충북도민원탁회의’가 28일 청주M컨벤션웨딩홀에서 ‘도민이 행복한 충북 어떻게 만들까요?’란 주제로 열리고 있다. 본 사진은 칼럼과 관련이 없습니다. / 김용수

하늘과 맞서 싸워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길 수가 없다. 하늘과 싸우는 자체가 우매한 것이기에 무조건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하늘을 감동시킬 수는 있기 때문에 정성과 열정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다. 학생 교육도 이와 같이 순리대로 천천히 변화 시켜야 한다. 교육은 혁신으로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직접 경험으로 보아 요즘 학생들에게 자율화는 당연 필요한 것이며 늦은 감이 있다. 피동적인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적어 실생활에서 적응해 생존하기 어렵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자만이 자긍심을 갖고 기대치보다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다. 타율적으로 교육되어 잘 되었다는 결과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강압적 타율로 단 시간에 큰 효과를 낼 수는 있지만 장기간으로 볼 때 자율적으로 스스로 깨우쳐 이룬 것에 비교할 수 없다.

자율화의 순서와 단계가 잘 못 되어 가고 있다. 두발 자유화와 머리 염색의 자유화를 내세우고 있는 교육자가 있다. 우선적으로 학생들의 자율정신과 자치 능력을 길러준 후 복장과 두발 지유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순리이다. 급격한 자율화로 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다. 필자는 유년기부터 좌측통행에 익숙해 있다가 근래와 우측통행으로 바뀌어 매우 어색했지만 어느덧 몸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팍팍한 시대 상황에서 현실에 맞게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교육과 관습은 서서히 변화 시켜 올바르게 바뀌어 가야 한다. 학생자치회를 부활시키고 학생들에게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본인의 잘못된 행동에 책임을 묻는 것을 제도화해야 한다. 창의적인 인간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자율화는 확대 되어야 하며 특히 학생회 자치화의 활성화와 자율적 자치활동을 보장해 올바른 민주시민 역량을 학생 스스로 개척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일부 지역에서 두발과 염색을 자율적으로 하겠다고 떠들고 있다. 자율이란 명분으로 앞서 가고 있는 것이다. 자율 정신을 배우지 않고 자율화로 가는 것은 너무 성급한 느낌이 든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들의 동의가 요구된다. 학생 자치회의 완전한 자치활동 보장과 기회 확대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계도되어야 한다. 자치활동을 통해 학생의 자기 주도적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고 문제해결 과정에서 미래적 역량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각 학교마다 자치활동이 자율적이던 것이 얼마 안 가서 통제 하에 활동해 오게 되었다. 필자도 1960년대 학생회 자치 활동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고 1990년대에는 학생회를 맡아 간부학생 지도교사를 도맡아 왔다. 이때는 몇가지 업무처리를 끝내고 빵과 음료수 먹는데 바빴다. 단순하게 소극적 학생활동만 보장하려 했다. 학생들에게 구속과 통제가 매우 심했던 그 시대에 학생회 요구는 소풍날 하루만 교복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 커다란 요구 사항이었다. 이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교감·교장께 야단도 맞았지만 끝내 관철했다. 단 하루 교복에서 해방되어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굴하지 않고 관철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뿐 더 이상 소풍 시 교복 자율화는 볼 수 없는 그 시대만의 특성이었다. 생활지도부와 같은 제도도 많이 바뀌어야 하고 교사들의 의식도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무한한 자유와 자율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학생 사안에 교사들의 책임을 물어서도 안된다. 자유가 주어진 반면 학생들이 한 잘못에 본인이 책임지고 학부모도 필히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성낙수 시인
성낙수 시인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에 가까울 뿐이다. 단체 생활에 혼란과 해악만 가져올 개연성이 매우 크다. 너무 오랜 시간 자율성을 말살해 놓다가 갑자기 풀어 놓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필자가 유년시절 잉꼬 새를 철창에 가두어 키운 적이 있다. 호기심 반 불쌍함 반으로 철창 속에서 잉꼬 한 쌍을 꺼내 놓아 주었다. 삼일 후 잉꼬의 주검을 맞이했다. 한 마리는 굶어 죽었고 다른 한 마리는 솔개의 먹이로 없어졌다. 순간의 자유를 얻은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바같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잉꼬를 풀어 날려 보낸 것은 결론으로 동정심이 아니라 차디찬 죽음을 맞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은 보다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쉽게 접근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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