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보디가드. / 클립아트코리아
보디가드. / 클립아트코리아

필자의 한때 꿈은 보디가드였다. 영화속에서 검은색 선그라스 뒤에 날카로운 눈을 감춘 채, 검은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몸을 날려가며 주요 인사를 헌신적으로 보호하는 모습이 소년이었던 필자의 눈에는 퍽이나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 즈음 전국 대학에 보디가드 관련 학과가 유행처럼 생긴 것을 보면 1992년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보디가드는 필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소년들의 꿈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꿈이 꿈인 까닭은 원한다고 모두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꿈도 정확히 꿈으로 멈추어 버렸다. 아마도 그에 이를만한 완력을 갖추기도 어렵고, 이런저런 현실의 벽에 부딪힐 즈음 다른 직업에 대한 환상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 즈음해서 법조인의 활약을 담은 드라마나 영화가 개봉되지 않았었을까? 결국, 영화 보디가드는 유명가수를 보호하는 잘생긴 보디가드가 자신의 직업 수칙에 따라 감정을 숨기고 짐짓 냉정하게 유명가수를 보호하다 크게 다치지만, 결국은 그 유명가수와 서로 사랑에 빠져 신분상승을 하는 현대 남성판 신데렐라 이야기라며 평가절하 해버리고 필자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인간의 측은지심 때문인가? 비단 영화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이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자신에게 의지하는 약자를 묵묵히 보호하는 숨은 보호자가 되고자하는 로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듯하다. 정색하고 말하면 범죄자의 칼끝으로부터의 위협이라든가 농담처럼 말하면 술자리에서 위험스럽게 돌고 도는 술잔의 위협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할 자유를 가지고 있고, 본성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함을 얻기 위해 그 자유를 무한히 사용하고자 하여 결국은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세상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홉스와 생각이 같았던 많은 현자들의 생각은 틀렸는지도 모른다. 들려오는 이름모를 의인의 에피소드들을 접하고 보면 서로가 서로의 보디가드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최선을 다한 형사재판에서 의뢰인이 무죄여서 직업인의 양심을 가지고 결백을 주장한 case가 있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무죄. 드라이한 변호인으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의뢰인은 황송할 정도로 필자에게 감사해 했다. 그 감사의 표시로 잠시의 당황스러움이 사라질 무렵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여 눈물짓던 과거가 스치어 갔다. 참으로 감사한 경험이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전깃줄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의뢰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가 왜 그렇게 나에게 모질게 했을까 며칠 밤낮을 고민도 했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난해한 말들에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끝까지 들어주는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는 벼랑끝에 서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말을 필자에게 쏟아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디가드. 필자가 이루지 못해서 꿈이라 여겼던 어릴 적 로망. 이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포기했던 꿈이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져 있었을 줄이야! 필자에게 그저 주어진 일이어서 열심을 다했던 그 일들로 인해 의뢰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서 나도 누군가의 보디가드였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필자의 꿈이 이루어진 지금 필자의 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 샘물과 같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를 법으로써 지켜야할 2019년을 헤쳐나아갈 힘이 본능처럼 샘솟는다. 오너라 미래의 위험이여. 내가 지켜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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