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아파트 거실 한 켠에 널려있는 검정 고추를 보니 싱긋 웃음이 나온다. 검정고추? 그렇다. 필자는 색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색맹이다. 그 장애 아닌 장애는 어린 시절 필자에게 매우 큰 콤플렉스였지만, 정작 살다보니 필자에게 약간의 불편만 주었을 뿐 변호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몇 가지 축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신체적 핸디캡을 오히려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는 편이다.

처음 필자에게 그런 핸디캡이 있음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시절 신체검사 시간에서였다. 당시 선생님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은 형형색색의 점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색신장애 판별지 앞에서 숫자를 도무지 읽지 못하는 어린 필자를 보고 반 친구들이 다 들릴 정도로 "어? 이 새끼 색맹이네?"라고 크게 말하였다.

그러고는 신체검사표 색신장애란에 스스로 '색맹'이라고 직접 쓰라고 말하여 필자가 직접 썼는데, 당시 신체적 핸디캡을 직접 쓰다가 차마 '색맹'이라 적지 못하고 '생명'이라고 흐릿하게 썼던 창피했던 손과 붉어진 얼굴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사건은 어린 필자에게는 나름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분이 왜 나에게 그렇게 험하게 대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필자는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일로 필자는 배려없는 말과 행동이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이후 가급적 남에게 상처될 만한 언행을 삼가고, 남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 그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소위 "말을 이쁘게 하는"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능력은 현재 필자가 변호사로 활동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배려하며 말하는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색맹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보고 확인한 것도 객관적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신체적 핸디캡은 필자를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필자가 인식한 검정 고추는 사실 누구나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빨강색이었고, 필자가 읽지 못한 단순한 점들의 집합은 누군가에게는 별다른 노력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숫자였기 때문에 필자는 이후 사소한 결정이라도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였다기보다 "경청하여야만 하는" 사람으로 확인된 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대리하여 그의 입이 되어 재판을 하거나, 의뢰인의 자문에 응하려면 당연히 의뢰인으로부터 재판이나 자문에 필요한 기초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들은 이야기를 법률적으로 분석하여 법원이나 자문 의뢰인에게 정확히 말하여야 한다.

변호사로서 살아가기에는 의뢰인의 옷 색깔이 빨강인지 검정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능력보다, 의뢰인의 사정을 잘 들어주고, 그(혹은 그녀)의 마음을 다치지 않는 말을 하고, 재판에서 대신 싸울 때에도 상대방을 흥분시키지 않으면서 재판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도록 이쁘게 말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색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눈은 신체의 능력의 상실 혹은 태생적 결핍이다. 하지만 눈의 일부 능력 상실 혹은 결핍이라는 핸디캡을 내어주고 이쁜 말을 할 수 있는 입과 듣기를 꺼려하지 않는 귀를 받았으니, 결국 필자는 색맹이기 때문에 변호사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법원에 가면 정의의 여신 디케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눈을 가리고 있다.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상징이다. 나면서부터 색을 구별하는 눈을 버리고 의뢰인을 위한 입과 귀를 택한 필자를 눈가린 정의의 여신에 빗대며 필자는 원래 법조인이 되어야할 운명이었다고 선해하고 싶다.

거실 한 켠에 비틀어져 말라가는 검정(?) 고추를 보면서 미소지을 수 있게 된 깨달음이 필자의 불완전함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되었듯이 필자를 찾는 의뢰인의 불안함이 앞으로 미소로 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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