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진천의 방골 큰애기/ 연지, 곤지에 분 바르고/ 꽃가마 타고 시집가지/ 상여를 타고 떠나가네//

인산말 큰애기봉 전설과 함께 마을에 구전되어 오는 애달픈 노랫가락 일부이다. 300여 년 흘러온 전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산수리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성림사 길 건너편 뒷산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떡갈나무 잎사귀가 소복한 오솔길이 배시시 길을 열여 준다. 사브작사브작 낙엽을 밟으며 산정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바라보는 눈맛이 훌훌하다.

인산(仁山), 어진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라 전해온다. 볕 바른 곳에 묻혀 있는 큰애기의 애달픈 사연이 유래비에 고스란히 새겨 있다. 유난히 커다란 봉분과 비 앞에서 그녀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마을 쪽을 굽어본다.

진달래 꽃눈이 옹송그리고 앉아 망울을 터트리지 못하고 있다. 3월 초, 산등성이의 바람이 아직은 찬 게다. 초례청에서 혼절한 정씨 처자의 넋 인양 안쓰럽다.

큰애기는 방골에 살던 어여쁜 규수다. 얌전하고 마음씨가 고와 인근에서 탐내는 이들이 많았다 한다. 때마침 초평의 이씨댁에서 매파를 넣어 혼사가 이뤄졌다.

납채를 받는 날이다. 마당에 차일을 높이 드리우고 초례상이 차려졌을 터이다. 신랑이 사모관대를 갖추고 초례청으로 들어섰다. 그때 하필 휘익 바람이 불어 신랑의 사모가 벗겨져 데구루루 굴러 뿔 하나가 떨어졌다. 신랑은 황급히 사모를 주워 쓰고 신부 앞에 섰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혼례를 올리게 된 신부는 신랑이 들어서는 기척에 살그머니 훔쳐보니 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외뿔 사모가 아닌가. 초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슴 설레며 기대했던 신랑이 재혼이라니….

어린 신부는 놀라 그만 혼절을 하고,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혼례식장은 장례식장이 되었고, 축하객으로 참석하여 조문을 하게 된 이들이 모두 안타까워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추모하는 유래비를 세워 영혼을 달래 준 것이 오늘에 이른다.

납폐로 수의 짓고, 잔치 술로 장례 치렀다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꽃가마 대신 상여에 실려 간 큰애기의 슬픈 이야기를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남모르게 부풀어 오른 소녀의 꿈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영원히 큰애기로 잠들어 있는 현장이 애잔하다. 큰애기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흔히 부르던 애칭이다. 그간 묘 관리를 시댁인 이씨 집안에서 해 왔다는 것도 가슴 뭉클하다. 두 집안이 약속한 혼사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귀하다. 인간적인 상호 존중이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오늘날 결혼을 쉽게 생각하고 헤어지기를 밥 먹듯 하는 세태에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서로 사고와 가치관이 다르면 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것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했다. 사람끼리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요. 그만큼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이야기다.

방골 큰애기 전설은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을 초월한다. 비록 혼인 생활은 하지 못 했지만, 두 가문의 혼인 약속이 중요시 되었음이 잔잔한 감동으로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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