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최한식 수필가

크고 무거우면 들어오기 어려워, 아기들은 작고 가벼운 몸으로 세상에 온다. 순리를 따라 세상을 떠날 때에도 몸이 왜소하고 가벼워진다. 어머니와 두 분 이모님은 평소 모습이 크게 달랐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자 별 차이가 없어졌다. 두 분에게서 어머니를 다시 대하는 듯했다.

세상에 올 때는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 그래도 새로운 살붙이가 세상에 왔다고 친지들은 기뻐하며 축하를 한다. 세상을 뜰 때에는 본인이 힘들다. 많은 이의 바람이 잠자듯 가는 것이지만 그 복이 모든 이의 것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이 한 생명체로 제 몫을 할 때까지 돌보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 기간을 정이 드는 세월로 삼는다. 자식들이 그 노고를 안다면 사춘기에 처신이 심히 어려울 게다. 부모가 자식에게 짐이 되는 때가 온다. 자녀들은 그 조짐을 사춘기에 들며 의식하게 될지 모른다. 부모님이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때로는 자신보다 더 무지, 무력한 걸 본다.

신체의 힘과 경제력이 뒤집히고 중요한 일의 결정권이 자녀에게 넘어갈 때, 부모들은 자식들이 성장했고 자신의 시대가 기울고 있음을 느낀다. 생의 과제에서 조금 벗어나 안도의 숨을 쉬려하면 또래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기 시작한다. 자녀에게는 부모의 어려움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다.

처음에야 모든 형제자매들이 놀라고 걱정하며, 어떻게든 정상을 되찾게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악화되고 일상에 서서히 주름이 잡혀가면 봄풀처럼 불만이 비집고 나온다. 매일 찾던 걸음이 뜸해지고, 그마저 부담스러워지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는 그 기간이 부모와 자식사이에 '정을 떼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살과 뼈를 물려준 그 분들을 어떻게 고이 보낼 수 있나? 고운 정을 적절히 떼고, 보내드리자는 마음의 준비기간이 자연스레 주어지는 게다.

요즘은 요양병원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그 순간을 맞이하는 부모가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까? 젊은 날 자신의 삶을 바쳐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든 자식들이 이제 늙고 무력해진 자신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다며 남의 손에 맡기기로 할 때, 서글픔이 얼마나 클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이 꼴을 당하려고 너희를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가?'하는 회한이 일게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에게 부담되지 않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가 생의 묵직한 과제로 다가온다. 처음 맞는 일은 늘 불안이 함께 온다. 그것이 가슴 한 편에서 떠나지 않으면 모든 것에 예민해진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게 아니라 작은 일에도 서운해지는 것 같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게다. 몸과 마음, 삶의 모습까지도 이 세상 떠나는 준비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나는 유년 시절에 마흔아홉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죽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 나이를 훌쩍 넘기고 육십 대 중반을 살아간다. 자칫하면 백 살 가까이 살아야 할지 모른다. 어쩌란 말이냐, 준비하지 못한 이 황당함과 곤고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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