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

친구 손자가 장가를 간다기에 코로나 바이러스 눈치 볼 것 없이 예식장엘 갔다. 바로 옆의 예식 홀 입구에서 축하객의 인사를 받고 있는 혼주의 가슴에 누렇게 번쩍이는 호박 단추가 눈에 띄었다. 저것은 소나무의 눈물이라는 내 관념 때문에 편치 못한 마음으로 그분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바라보았다. "대부분 부친들은 양복을 입는데 커다란 호박단추 자랑하려고 한복을 입었나?" 혼자서 빈정거렸다.

사춘기 소녀시절부터 나는 소나무를 좋아했다. 궁벽한 산기슭이나 메마른 길가든 혼자 서 있어도 소나무의 귀품은 고고하다. 어린 소나무는 엄전하여 어른스럽고, 늙은 소나무는 오히려 위풍당당 젊은 용맹을 풍긴다. 먼 숲속에 살아도 매일 만나는 벗처럼 친근감을 느낀다.

그렇잖아도 산을 좋아하는 내가 정을 주는 벗, 소나무가 있으니 시도 때도 없이 산을 찾는 습관이 있었다. 퍼질러 앉아 붉은 둥지에 살며시 기대면 역동적이진 않지만 강한 기(氣)를 느낀다. 벗은 내가 몰고 간 잡상스런 번뇌와 세상먼지들을 걸러준다. 내가 내쉬는 호흡은 벗이 마시고, 벗의 날숨인 산소는 내가 마시고, 우리는 숨을 교환한다. 오늘도 그가 내쉬는 맑은 숨 바람에 답답한 가슴 헹구고 싶어 솔버덩에 왔다.

올라오자마자 장난스럽게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벗이 첫밗에 눈에 들어왔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 곁으로 가니까 손에 닿을 듯 나를 부르던 팔이 언제 올라갔는지 휙 높아져서 중간 하늘에 있다. 붉은 미늘에 가슴을 대고 꼭 껴안아보았다. 어느 남자의 품이 이렇게 좋고 편안하랴. 깍지 낀 손가락을 놓기 싫다. 올라오면서 내밀던 땀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나는 소나무 아래서는 자리를 깔지 않는다. 솟구친 뿌리에 앉아 사색을 한다. 언제나 솔버덩에 오면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불투명한 감정들은 올 때마다 내려놓고 일어나지만 핸들만 잡으면 언제 버렸냐는 듯 그대로이다.

젊음 탓이었을까, 버리고 싶은 나, 내가 싫어하는 나, 에고(ego)를 쏟아놓고 싶어서 언제쯤이면 자유로워질까 고민하며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마다 산을 찾아 나섰다. 그 무렵이었다. 아직 어린 소나무에서 송진을 보고 '무슨 고민이 있어 눈물을 흘리는가' 생각다가 사람의 눈물보다 진한 송진은 소나무가 온몸으로 밀어내는 번뇌의 엑기스 눈물이라 느꼈다. 어른들이 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매달던 누런 보석 호박이 바로 소나무의 눈물이다.

간난신고의 세월을 살고 또 살아 백년, 천년이 되면 소나무의 가슴에 아침 이슬처럼 맑고 영롱한 보석이 박힌다. 호박이다. 어린 소나무의 맑은 송진이 비바람을 견디는 십년 세월이 가고 또 십년가면 조청보다 더 끈끈한 점액이 된다. 그 점액을 안고 헤아릴 수 없는 인고의 세월을 백년, 또 백년을 살아 엉기고 엉기어 천년을 견디면 굳어서 박히는 것이 호박이다. 일각이 여삼추였을 고통의 세월동안 차마 삭이지 못한 눈물을 울근불근 땅위로 드러난 발등에 많이도 떨어뜨렸으리라. 가슴의 응어리가 단단한 구슬이 되는 동안의 세찬 비바람에도 당당하게 귀품을 잃지 않는 것이 소나무다. 내 벗의 쓰라린 눈물을 보석이라며 단추를 만들고 목걸이와 반지를 만든다. 세상의 일들은 언제나 모순투성이인 걸 어쩌랴. 약육강식의 아픔이 합리화 된 먹이사슬이듯, 그냥 그렇게 순리로 받아들여야 된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눈을 감고 하늘을 본다. 내 안에 있는 나의 하늘. 무량이다. 틈새에 솟은 무지개를 붙잡고 일어났다. 이별 인사를 위해 장난치듯 삐딱하게 구부린 소나무둥지의 보굿을 쓰다듬어 본다. 그 속의 흐름을 느낀다. 내 혈관 속처럼.

그렇구나,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솔 벗처럼 지금 이대로가 나 인 것을, 공연히 나를 찾겠다고 헤매고 다녔구나. 나를 찾아 준 벗이 바로 소나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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