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자공(子貢-공자의 제자)이 초(楚)나라를 여행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올 때 한수(漢水)를 지나다 촌로를 만났다. 무엇 때문에 평범한 촌로가 공부깨나 한 자공의 눈에 띄었을까? 내려가는 길이 나 있는 깊은 우물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올라와 채소밭에 물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공의 눈에는 그 촌로 행동이 참으로 답답하고 미련해 보였던 거다. 자공은 분명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힘든, 아니 우둔한 짓을 되풀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공은 그 촌로에게 말을 걸었고, 촌로는 범상치 않게 응수했다.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이나 물을 댈 수 있습죠. 조금 힘을 들이고도 효과는 크게 얻을 수 있는데 어째 그걸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기계를 갖게 되면 그로 인한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기계로 인한 일은 반드시 욕심을 부르네. 기계의 편리함에 빠지면 순수 결백함을 갖추지 못해 신묘한 본성이 안정을 잃게 된다네. 기계를 몰라서 아니라 부끄럽게 여겨 사용하지 않는 것이네."(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莊子:제12편 天地>.

자공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혼미해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저 일시 멍하니 촌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촌로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연신 우물로 내려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 채소밭에 뿌리기를 반복했다. 힘에 겨워 쉴 만도 하지만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은 채 물을 길어 올리는 무거운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 기계는 '바퀴에 줄을 걸고 물을 퍼 올리는 도르래'를 말함이다. 자공은 촌로가 왜 굳이 도르래를 마다하고 사서 고생을 하는 가에 의문이 들었다. 반면 촌로는 자공이 효율, 편함, 이익, 이른바 가성비에 집착해 욕심의 나락으로 추락시키면서 기계에 얽매이라고 강요하는가에 몹시 불쾌했다. 촌로의 불쾌감은 '인간은 기계의 편리함과 효율성 때문에 기계에 종속되어 노예가 된다.'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기계나 도구의 발명으로 몸과 마음이 편해진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들이 없으면 정신 육체적 행동이 서툴고 게을러진다는 점이다. 행동과 사고가 철저하게 기계의 효율성에 의존하는 반면 몸과 마음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함은 물론 하지 않는다. 인간의 편함을 위한 기계가 이제 인간을 정복해 인간을 종처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기계 의존, 아니 종속은 인간의 교만과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잉태해 인간의 본성을 망친다.

자공은 중국 춘추시대 위(魏)나라 유학자다. 기원전 400년대 사람이다. 당시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줄일 수 있는 기계나 도구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자공과 촌로의 마주침은 촌로는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로부터의 자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고, 자공은 기계사용으로 인한 인간의 주체 상실을 꼬집는 촌로의 촌철살인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공은 겉으로 평범하지만, 속으론 범상치 않은 촌로에게 허를 찔린 셈이다. 한낱 촌로 입에서 범상치 않은 발화를 놓칠 수 없지만, 자공의 메시지 접수 역시 새겨볼 만한 일이다.

촌로의 일침은 과학 문명 시대에 이르러 더욱 그 가치를 발하고 있다. 기계의 인간 지배가 몸과 정신에 부지불식간 깊숙이 안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두뇌와 손발의 수고를 덜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도르래를 비롯해 자동차, 계산기, 전기, 전화 등 각종 제품과 도구가 두뇌와 손발을 대신한다. 대표적 기계가 쥐가 아닐까? 컴퓨터 입력장치인 마우스(Mouse) 말이다. 마우스는 커서(Cursor)를 통해 명령어를 선택하거나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정보나 지식을 포획하고 시공간을 초월해 의사소통한다. 한동안 독차지했던 마우스의 인간 지배 권력도 이젠 일정량을 스마트폰에 이양하기 시작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인간은 마우스와 스마트폰이 없으면 하루를 보낼 수 없다. 인간의 장기(臟器)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됐다. 이 기계들은 정보와 지식 등의 포획 대리자에 앞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정복자에 더 가깝다. 인간은 이에 대항할 힘도 없고 하려 하지도 않는다. 기계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기회를 무진장 제공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스스로 정보나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되고, 그 기계는 인간을 조종한다.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형성 지위나 그 네트워크 등 비물질적 기계도 인간을 지배한다. 이의 지배력은 더 가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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