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설은 다음이 궁금하여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수필은 이런 일이 있구나 싶어 접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낱말이나 문장에 반해 검색해보고 적바림해 놓은 것이 덤으로 꽤 많아졌다. 처음에는 열심히 적고 암기했으나, 이러다가 본의 아니게 표절이 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지금은 습관처럼 적기만 한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니 신세 생각해서 후살이 가라고 넌지시 걱정을 내비치지만, 호기심은 노화를 늦춘다지 않는가.

'대 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이란 독특한 시구가 시선을 붙든다. 지인은 미아리 텍사스촌을 가봤나 하고 시큰둥했지만 이런 낯선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시인이 부러웠다.

소설 당선 격려차 선배님이 주신 적바림 노트에서 풀솜 할머니란 낱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들어 따끈한 커피나 뚝배기 청국장이 그리워지는 계절이어선지 여기에 꽂혔다. 언뜻 어떤 식물 이름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외손에 대한 애정이 따뜻하고 두텁다는 뜻으로, '외할머니'를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손주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말을 실감할 만큼 무엇이든 주고 싶은 내 마음을 누가 알고 이런 말을 만들었는지 느낌표를 찍었다.

어린 시절 이맘때쯤 시골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는 군불 지피며 춥다고 아궁이 앞으로 바짝 끌어 손을 녹여주셨다. 고무래로 빨간 불덩이를 꺼내 국수 꼬랑이를 흐벅지게 구워주셨는데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것도 별미였다. 밥 잦힌 잉걸불 질화로를 방으로 들여와 고구마며 군밤을 구워주셨다. 환을 그리며 허겁지겁 먹는 나에게 먹는 모습도 어쩜 그리 이쁘냐고 늡늡하게 껍질을 벗겨 주셨다. 식지 않는 온돌방 아랫목 같다고 아기같이 꼭 안고 주무셨으니 영락없는 풀솜 할머니였다.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흰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은비녀를 꽂으셨는데 아주 정갈하셨던 모습으로 그리움을 심어 놓으셨다.

이제는 내가 그런 풀솜 할머니가 되었구나 싶은데 아직은 어리고 멀리 있으니 선잠 깨울까 그저 영상으로 보여줄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대신 천연식초의 풀솜 할미가 되기로 했다. 오래 식음을 한 지인이 천연식초의 좋은 점을 강조하며 권했다. 만병통치약 같음이 흥감스러워 신뢰가 덜 갔으나 눈에 좋다는 것에 끌려 초 밀란 만들기 시도를 했다. 유정란에 천연식초를 넣어 일주일 실온에 놔두면 겉껍질은 다 녹고 속껍질만 남는데 건져내고 물 3에 식초 1을 섞어서 식후에 바로 소주잔 한잔 정도에 꿀을 타 마셨다. 한 달여 마시고 눈 검사를 했더니 망막에 있던 부기가 삼 년 만에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참으로 신기해서 천연식초의 풀솜 할미를 자처했다. 식초 마니아보다 풀솜 할미라는 우리말이 더 정겹지 않은가.

눈이나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 없이 마음껏 책을 볼 수 있으니 천연식초의 풀솜 할미가 한번 되어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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