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마스크도 가리지 못한 그 환한 미소가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태풍이 지난 자리였으나 새벽에 내린 비의 싱그러운 기분을 느끼려 산책에 나선 길이었다. 아파트 조경이 제법 잘 관리되고 있어 빗물을 머금은 꽃과 나무를 보며 걷는 건 모니터 앞에 앉아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조용히 걷는 길에 작고 약한 꽃나무에 기둥을 세워주고 있는 그분을 보았다. 그 모습이 궁금해 잠시 눈길을 준 사이 둘의 눈이 마주쳤고 서로 환하게 웃었다. 마스크 너머의 미소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나도 몰래 말을 걸었다.

"깃대를 세워 주시는 거에요?" "네, 어젯밤 비에 얘들이 모두 힘을 잃고 쓰러져서 살 수 있게 해 줘야 해요." 그가 일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야생화들이 쓰러지기도 하고 억센 아이들에게 치여 숨죽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작은 애들은 살 수 있도록 자리도 좀 옮겨주고. 큰 애들은 너무 크지 않게 좀 솎아주고. 그러고 있어요. 아침마다 얘들이 눈에 밟혀서." 작고 여린 생명을 보살피는 그의 손길이 꽃보다 더 멋져 보였다.

"사실은 여기저기 힘든 애들을 좋은 곳으로 옮겨주고 싶은데 무릎이 안 좋아서 시도를 못하고 있어요.", "15동 앞이 정말 예쁜데." 아, 15동은 우리 집 앞인데, 그래서 그랬나 엉겁결에 말이 나와버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오늘은 시간이 안 되고 다른 날 하셔도 되면." 시간을 쪼개어 사는 상황이었지만 내게도 그 시간이 필요했을까.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이상한 직업정신의 발현일지도.

그래도 되냐는 그의 되물음에 그렇다고 크게 응답을 하고 2주 뒤 일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아, 그 2주간 얼마나 많이 갈등을 했던지. 나가야 하나? 기억은 하실까? 바쁜데 괜한 짓을 했다며 스스로 주책스럽다 나무라기도 하면서 시간이 지났다. 약속한 날, 혹시나 하면서 2시에 맞춰 정원에 나가니 그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꽃을 옮겨 심었다. 한 무리는 '문빔'이라는 아이였고 다른 무리는 옥잠화였다. 2주를 고민한 것 치고는 너무 쉽게 끝나버린 일이었지만 혼자 하던 일을 응원하고 도와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며 고마워하시는 그분의 모습에 오랜만에 스스로 잘했다 칭찬도 해주었다.

이 소소한 일을 굳이 이리 상세히 쓰는 건 그 과정의 우연이 신기하기도 하고 서로 마음을 열고 이웃이 된 그분과 나의 열린 마음이 자랑스럽기도 해서다. 우린 서로 부담 없이, 다음 약속 없이 헤어졌지만 서로의 정원을 살피며 동네가 참 살기 좋다 여기고 지내게 될 것이다. 마음에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정원을 가꾸고 싶은 동네 분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싶기도 했다. 호미 한 자루 들고 일요일 오후 2시에 만나 식물을 가꾸고 쿨하게 안녕하는 모임 말이다. 서로의 관계에 상처받지 않고 하는 일도 나이도 묻지않고 오로지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일.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그러고 보니 요즘의 공동체는 이런 게 아닐까.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기는 어려워졌으니 서로 모르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일 말이다. 내가 즐거웠던 건 스스로 그 일을 결정하고 참여하고 나누었기 때문이다. 난 식물보다 사람에더 관심이 많아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는 그분에게 끌린 것이다. 덕분에 문빔과 옥잠화도 알게 된 거겠지. 말로만 주민조직을 외치는 내게 이 에피소드는 작은 가능성을 열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던 일이지만 혼자보다 둘이 좋아 굳이 2주를 기다려 준 그분의 어진 마음이 공동체의 기본이 아닐까. 이젠 내 차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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