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초등학교 때부터 소리 내서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어줍잖게 글짓기대회, 웅변대회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낭독과 연설연습 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기실 일찍이 고인이 된 아홉 살 터울인 작은 형의 영향이 컸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雪國)》을 소리 내서 읽던 형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 나라였다~"로 시작되던 그 소설. 중고교 시절에 번역본을 읽은 바 있고, 대학 이후 일본어를 익히고 나서 원서를 읽어 보게 된 것은, 순전히 그 소설을 낭독하던 작은 형의 영향이 컸다. 형은 시집도 많이 낭독했다. 그리고 습작 노트도 여러 권 가지고 있었다. 나도 따라 읽었다.

중고교 시절에도 그런 습관은 계속되었다. 특히 중학 이래 영어에 흥미를 느껴 교과서나 참고서의 문장을 낭독하면서 공부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들어가 보니 나보다 영어책을 더 유창하게 읽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고교 2학년 때 학교 대표로 뽑혀 달포 가까이 평화봉사단으로 온 미국인에게 발음지도를 받고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대학 이후에는 기회 되는 대로 시집을 구해 읽었다. 70년대 80년대 시는 창비(《創作과 批評》) 파와 문 지(《文學과 知性》) 파로 나누어져서 있었는데, 전자에 경도되어 현실 비판적 시들을 많이 읽었다. 그것이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를 견디는 힘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코너에 들러 한두 권씩 낭독하기에 적당한 시집을 산다. 오래전 시내서점에서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드는 시들을 발견하고 같은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사서 여러 번 읽었다. 얼마 후 단재교육원에서 그 시인 김은숙 선생을 만나 친해지게 되었고, 청주YMCA 이사장 당시 내가 진행하는 '목요강좌'에 김 시인을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시집 다음으로 많이 하는 낭독하는 책은 성경이다. 성경 66권 중 특히 시편과 잠언 전도서, 아가서, 예레미야 애가 같은 것들은 좋은 낭독 거리다. 연간 한두 번 표준새번역 성경과 개역개정판 성경을 번갈아 가면서 통독하는데, 위와 같은 시가서 또는 신약 후반부의 서신서는 소리 내 읽게 된다. 성경 기자의 생각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고 강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반복해서 낭독하며 중요한 단어가 입에 배게 되어, 말하거나 글 쓸 때 사용하게 된다.

25년 전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던 해 가을, 청주 MBC TV에서 1년간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영광을 얻었다. 재미를 붙일 무렵 IMF로 프로그램이 중단되어 아쉬웠다. 2년쯤 지나 청주 KBS의 불림을 받아 다시 시사프로 진행을 맡게 되어 13년간 쓰임 받았다. 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는데, 전날이나 당일에는 틈나는 대로 대본을 소리 내서 읽으면서 암기하고 소리를 가다듬는 훈련을 해서 프로그램을 잘 진행할 수 있었다. 그 근저에 어린 시절부터 해온 낭독의 힘이 있다.

내가 경험한 낭독의 유익함은 다른 이들도 인정하고 있다. 우선 학습효과를 높인다고 한다. 소리 내서 읽으면 눈으로 글을 보고 소리를 내고 듣기까지 하므로 두뇌가 3중 자극을 받는다. 다음, 소리 내서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 집중력과 암기력을 높인다. 또한, 표현력과 발표력을 향상시킨다. 정확한 발음과 조리 있는 발표를 통해 말하기 실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목소리도 좋아진다. 낭독하게 되면 높낮이 속도 울림 등을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되고 자연히 목소리를 가다듬게 된다.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다. 감정적으로도 지친 마음일 때 시집을 읽거나 소설 등을 낭독하며 위안을 받고 감정도 정화된다.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가을이 깊어간다. 집안 여기저기 던져놓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던 시집들을 집중적으로 한 권씩 낭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첫 작업이 어제 아침 새벽예배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침대머리에 놓여져 있던 천양희 시인의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를 소리 내서 통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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