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화가

올해 이어령 교수가 돌아 가셨다. 2022년 2월 26일 눈을 감으시니 향년 88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생명자본과 갓길과 88올림픽 굴렁쇠의 문화 창조자이다. 디지털과 아나로그를 합성한 '디지로그'라는 새 낱말로 미래에 닥칠 전인미답의 인류문화를 압축하였다. '축소지향형의 일본인'이라는 저서로 일본의 민족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중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일본인의 특성을 간파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필적하는 명저이다. 그는 한국말로 세계의 현상을 가름한 언어의 달인이었다.

이어령의 삶의 마지막 궤적은 병마에 시나브로 침식되어가는 감성을 형형한 지성으로 극복하는 초인적 순간의 연속이었다. 어김없이 시시가각 밀려오는 자신의 죽음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횃불처럼 응시하고 전달한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넘어 생명의 죽음을 찬미한다. "죽음은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화려한 한가운데.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고향이지."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사라진 상태'라고 정의 한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인간 이어령은 극강의 고통 속에서도 죽기 하루 전 까지 삶의 문을 활짝 열고 이웃들을 맞이했다. 2월 26일 환한 대낮, 이어령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음과 포옹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완성했다. 이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6월 23일은 20세기 대한민국 경제학계의 태두이자 정치인 조순 교수가 향년 94세로 별세 하였다. 그의 희고 긴 눈썹 백미(白眉)는 초탈한 도인을 연상케 한다. 밖으로는 러시아의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향년 8월 30일 91세로 길을 떠났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소련의 해체와 냉전종식의 물꼬를 튼 세기적인 정치인이다. '고르비'라는 애칭이 잘 어울리는 그는 소련 초대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9월 8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오랜 왕좌에서 내려와 하늘로 향하였다.

10월 4일은 김동길 교수께서 영면한다. 향년 94세로 '내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훌훌 벗고 떠나가셨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946년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제24대 문교부 장관 김옥길 교수와는 남매사이로 두 분 모두 평생 독신으로 무소유의 삶을 보여 주었다. 6.25 전쟁 중 서울이 수복 되자 부산에서 상경하던 23세 청년 김동길이 탄 배가 거센 풍랑을 맞는다. 김동길은 마스트를 잡고 필사적인 기도를 드린다. "제게 사명이 있다면 살려주십시오." 풍랑이 잦아들고 살아난 그는 절박했던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사명자의 삶을 살며 곳곳에서 사자후를 터트린다.

"우리 조국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사명이 있는 개인은 죽지 않고, 사명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참다운 어르신이 아닐 수 없는 분이시다.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화가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화가

'어른'은 누구일까? '어른'은 우리의 고유의 말인 '얼'에서 나왔다. 한민족의 근저에는 번역되기 힘든 '얼'의 문화가 넓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 얼차려, 어리석다(얼이 썩었다), 얼간이(얼이 갔다), 얼찬이(얼이 꽉 찬 사람)와 같은 말이 아주 많다. '얼'은 어울림이고 조화이다. 남녀가 어울릴 때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린다. 남자의 알과 여자의 알이 어울려 알라(아기)가 된다. 알라는 커서 어린이가 되나 어울림이 아직 여리기에 '어린이'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나가 살면서 얼이 너른 '어른'이 된다. 인생의 신산고초를 겪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얼이 신처럼 밝아지면 비로소 신명한 '어르신'이 된다. 한민족에게 '어르신'은 더 없이 영광스러운 호칭이다. 개개인의 어울림, 민족의 어울림, 하늘과 땅과 사람의 어울림도 있다. 가장 큰 어울림을 '한얼'이라고 한다. 옛 부터 "우리는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다." 라는 깨달음의 말이 전해 내려온다. 나와 우리와 모두가 한얼임을 체득한 사람이 곧 어르신이다. 한민족의 어르신인 단군의 건국이념인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 곧 우리의 사명이다. 이미 이러한 사명을 받고 태어났음에 그 사명을 생사를 초월하여 완수하는 사람이 곧 '어르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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