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최원영 K-메디치 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모든 생명은 인간의 필요성에 관계없이 존재 자체로 존귀합니다." 종교단체 선언문 일부인데, 청소년들에게 '존귀'라는 단어 뜻을 물었더니 '매우 재미있는 존재'라는 답이 돌아왔다. 글의 맥락이 완전히 뒤바뀌는 셈이다. 사흘을 4일로 이해하고, 5인 이상 모임 금지는 6명부터라는 해석을 하는 일도 있다. 심심한 사과가 무성의한 표현이라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문해력 부족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문해력은 현대사회에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글을 읽고 이해하는 최소한의 능력이다. 사회경제적 활동은 물론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역량이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역량이다. 선진국이 문해 교육에 국가차원의 투자를 하는 이유다.(EBS, 당신의 문해력)

부동산 매매를 하면서 계약서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 못하면 재산상의 큰 손실을 입을 수 있고, 병원이나 약국의 처방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평생학습이 강조되는 시대에 문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 사회 문해력 수준이 점차 떨어지고 있어 우려를 사고 있다. 청소년의 40% 정도가 문해력 미달이고, 대학생 역시 65%가 미달수준이며 10%는 강의가 불가능할 정도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왔다. 성인 또한 OECD국가 성인역량평가에서 언어영역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나이가 들수록 더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21년, 디지털 환경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에서 한국이 최하위라는 통계도 있다. 문해력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이 떨어지는데서 나온 결과다.

문해력 수준이 이처럼 우려스러운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는 배경에는 영상매체를 선호하면서 글을 읽기 싫어하는 생활양식의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영상매체는 이미 기존 미디어 영역을 잠식했다. 글을 읽기 보다는 영상을 통해 학습하고 정보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책보다 영상을 선호하다보니 글쓰기 능력도 떨어져 두 줄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일이 흔한 일이 되었다. SNS 상에서 유행하는 이모티콘이 다채로운 표현 방법의 하나라는 건 인정하지만, 글쓰기의 한계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무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문해력의 격차는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성장기의 문해력 격차가 사회생활에서 직업과 수입을 좌우하는 요인이라는 추적 조사가 나오고 있다. 가짜뉴스를 식별하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집단사고에 빠져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회 통합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문해력 수준이 기대 수명을 좌우한다는 영국 문해력 재단의 연구결과도 있다.

최원영 K-메디치 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최원영 K-메디치 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교육현장을 비롯한 정부 차원에서 문해력 수준 향상을 위한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2020년 미국 연방고등법원은 '문해력 교육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국가의 공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문해력의 문제는 공교육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고, 사회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가 되었다. 문해력 수준이 삶의 질을 개선하고 사회 통합의 밑거름이라는 차원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국가과제로 접근해야 한다. 기본 교육은 국민의 헌법적 권리인 동시에 국가의 책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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