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김성우 충북재활원장

요즘은 스마트워치가 대세라고 하지만, 그래도 시계라고 하면 '시침, 분침, 초침'이 있는 바늘시계가 시계의 대표적 이미지라 생각한다. 어떤 시계는 따로 초침 바늘을 넣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시계 안에는 초침의 기능을 하는 작은 톱니바퀴가 꼭 들어있다. 그런데 시계를 볼 때, 사람들이 초침까지 보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보통 시침과 분침을 한눈에 바라보고 시간을 인지한다.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다고 해서, 시계의 초침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초침이 느려지거나 반대로 기준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없으니 초침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초침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분침도 시침도 역시 엉망이 된다. 비록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지만, 초침이 제대로 기능을 할 때, 분침과 시침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기능은 다르지만, 서로 다른 기능과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직 전체를 작동시키는 것을 연대성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한다.

사회는 시계보다 훨씬 복잡하다. 시계와는 달리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도 등장한다. 어느 한 경우의 수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사회이다. 이렇게 많은 것이 서로 얽혀 있는 사회가 원활하게 유지되고 발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각자 조금씩 다른 답을 내어놓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한 위치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된다. 마치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이 서로 맞물려 각자가 제 기능을 다할 때 시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처럼,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주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될 기본을 충실히 지킬 때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될 것이다.

지난 10월 29일, 우리는 2014년 세월호 참사 못지 않게 참으로 어이없는 '이태원 참사'를 겪었다. 158명의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만 했고, 유가족의 아픔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국민들 또한 정부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을 느끼고 있다. 해외 언론에서 말하듯, 이 참사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인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누구하나 나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공허한 사과만 종종 들릴 뿐이다. 이태원 참사 책임자로 소환조사를 받는 사람들의 명단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지만, 국민들의 허탈함과 실망감을 채워주지는 못하고 있다.

연대성의 사회적 기능은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마치 초침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대성의 사회적 기능은 드러난다. 그 집단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하느냐가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위를 항해하는 배는 참으로 평화로워 보일 것이다. 선장은 딱히 하는 일이 없어 보일 수도 있고, 조타수가 간혹 뱃머리를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거친 풍랑과 파도를 만나게 된다면, 이 배에 탄 모든 선원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제대로 발휘함으로써, 무사히 위기를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가해 보이던 선장의 진두지휘 아래, 자신의 역할을 민첩하고 정확하게 수행함으로써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기적 결합을 있을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대책임' 또한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한 제 2의, 제 3의 피해자만 생길 뿐이다.

김성우 충북재활원장
김성우 충북재활원장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연대성의 사회적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본다.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기본에 충실한 모습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위기를 대처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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