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보며 건축 설계도가 상상되는 사람도 있을까? 건축 관계자는 몰라도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재미 삼아 해보자.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설계도가 그려져 건축이 된다면 그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면들이 닫혀 있기에 방에 들어갈 수 없고 한번 들어가면 벽을 부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아니 자세히 보면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검은 선의 격자에 의해 단절이 되어 있는 한편 격자 없이 터진 곳에선 열려 있다. 분리와 열림의 구조를 취한다. 그렇더라도 집의 문과는 성격이 다르기에 그런 모양의 집이라면 답답함이 느껴질 것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면서 답답하다고 느낄 사람들이 있을까? 밀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나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아마 없을 것같다. 몬드리안의 그림에 대해 추상 미술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답게 느끼고 경외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왜 그럴까.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뇌의 연상 작용으로 인해 혹 느껴질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고 왜 미학적 감응이 올까.

질문 자체가 엉뚱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때론 과감하고 일탈적일 필요가 있다. 우주 탐사나 문명의 전환, 과학의 향상은 일탈적이고 비상식적인 질문에도 빚져 있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만 해도 사과는 왜 아래로 떨어질까, 너무도 당연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몬드리안이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단절한다. 1차 세계 대전의 영향도 크다. 세계가 무질서하고 혼란 자체로 돌변하자 그는 본질을 찾고 싶었고 그 방향의 형상화로 나아간다. 그림에서 가변적인 것들을 지워나간다. 남은 것이 수직과 수평이다. 색의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만 취한다. 지우고 버려 더 버릴 수 없는 자리까지 온 것이다.

칸딘스키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는 창 밖의 초록색 나무가 보기 싫어 창을 등지고 앉았다고 한다. 곡선도 배제했으며 심지어는 대각선의 수용 여부를 놓고도 그가 주도한 예술 조직의 동료 화가와 다투어 결별했다고 한다. 몬드리안은 대각선마저 거부했다. 그런 철저함, 본질 추구 및 형상화에의 집요한 일념. 그런 것 역시 몬드리안의 그림에 미학과 아우라를 제공할 것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바우하우스에게도 그렇다. 르 코르뷔지에에게서 아파트 개념이 나오고 상당수의 현대 건축물이 바우하우스에 빚진다.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도 몬드리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지표면을 선으로 본다면 그것을 경계로 지질학과 지리학이 나뉜다. 그 선을 지우면 양쪽의 세계가 서로 트여 색다른 공간이 생성된다. 그것이 선 지우기의 효과라고 한다면 이 글은 수직과 수평 그 단순한 선 외엔 모든 것을 지운 한 화가의 예술 세계의 간결한 추적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선은 몬드리안에게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이며 최상의 본질이다. 선에 의한 명료한 분리가 없었다면 몬드리안도 없었고 르 코르뷔지에, 바우하우스, 스마트폰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몬드리안의 예술적 성취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과거와의 단절의 덕택으로 내겐 여겨진다.

선이 사라짐으로써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의 연결이 가능하고 선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효과도 있다. 이 두 경우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두 학문은 둘 사이의 벽을 넘어서게 되면 혼융의 장이 열린다.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과거의 벽을 단호하게 넘어선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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