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혈액형 검사 결과통보를 받은 초등학교시절 어느 날. 졸지에 나는 잘 삐지는 아이가 되었다. A형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각자의 혈액형을 놓고 각자의 성격에 대한 고백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 나도 소심한 면이 있는 듯하여 '사실 나는 잘 삐진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주변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만 같았다.

중학교 때 아이큐 검사를 한 이후 '머리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고, 고등학교에 이르러 직업 적성 테스트를 거치면서 '군인'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어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 나의 자아는 '소심하지만 머리 좋은 군인'으로 확립되었다.

'검정 눈사람'같은 모순된 형용의 '소심한 군인'이라는 자아 때문인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겁이 많은 사자' 캐릭터가 가장 좋았다. 그렇게 결과가 나의 청년기를 규정했고 나는 순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험이 쌓여가고 나름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이 커지면서 세상 사람들이 네 가지 혈액형에 따라 특정 성격을 갖는 것은 과학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 경악스런 결정을 시원시원하게 내려온 경험 상 '소심한 A형'이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각종 시험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머리 좋은'이라는 수식어 역시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의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을 통해 절제하는 군인은 나에게 적합한 직종이 아니라는 합리적 의심이 생겼고, 입대하면서 씁쓸하고 전역하면서 신났던 개인적 경험은 나의 적성이 군인은 아니었음 증명해 주었다. 결국 나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와 다른 자아로 살아왔음이 밝혀졌다.

생각을 떠올려보니 고등학교 직업 적성검사를 하던 때, 한 선생님이 질문문항 답지에 체크를 제대로 안하는 나를 보고 성의없다고 혼내셔서 시험을 보듯 허겁지겁 대충 아무거나 체크했던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때 누군가가 결과지는 단순 참고용이고 흥미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해주었다면 잘못된 자아를 가지고 20여년을 살아가지 않았어도 될 것을… 아직도 어떤 필요 때문에 인간형을 나누고 아이큐를 테스트하고 직업적성 검사를 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면서 '스파크형, 재기발랄한 활동가'라는 새로운 자아를 얻었다.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면서 MBTI검사를 하였는데, ENFP라는 결과를 얻었고, ENFP의 특성을 단순하게 표시하면 재기발랄한 활동가라고 했다.

MBTI 인간형 탐구(?)는 그간의 검사보다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설문과 답변에 기반해서 나의 성향이 잘 분석되어 있는 느낌이 강했다. 그 성향은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닌지 문항이 바뀌고 처음 테스트한지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한 타입의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간 경험했던 여러 검사보다 신뢰성이 높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자기소개에 MBTI 유형을 밝히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ENFP 유형의 사람은 정열적이고 활기가 넘치며 상상력이 풍부하며, 온정적이고 창의적이며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시도한다고 한다. 문제 해결에 재빠르고 관심이 있는 일은 수행해내는 능력과 열성이 있고, 통찰력과 창의력이 요구되지 않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열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적성 문제로 대학을 자퇴하고, 전공을 바꿔 재입학하기도 하고 회사원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안정적인 회사생활에 무료함을 느껴 갑자기 사직서를 던지고 결국에는 법조인의 길로 들어온 내 삶의 궤적에 비추어 보면 위의 MBTI의 결과가 기가막힌 점괘처럼 잘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ENFP의 구체적인 특징 중 공감을 잘해 감동을 잘하고 눈물도 잘 흘린다는 점, 눈치가 빠른 편이고 당장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분위기 파악을 상당히 잘한다는 점, 타인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점, 사람을 쉽게 밀쳐내지 못하는 모습, 멋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 단순 암기에 약하다는 점,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 등은 나의 특징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주변에서도 나를 명!백!한! 흥부자 ENFP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NFP의 특징으로 기술된 내용대로 살지 않기로 했다. 내 마음에 드는 특징이어도 정해진 인간형에 매몰되어 나를 특정 인간형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로 ENFP인 나는 어디서든 분위기를 띄워야 할 것 같고, 무언가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해야만 할 것 같고, 타인을 즐겁게 만들어야만 할 것만 같은 압박이 있다.

인간형 검사가 나의 청년기까지 미친 영향은 좋은 기억이 아니다. 남의 말을 곧잘 믿는 나로서는 그 결과에 속박되어 나를 스스로 단정하고 중요한 의사 결정에 큰 장애가 되었다. 덕분에 먼 길을 돌아왔다. 게다가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는 MBTI결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크리에이티브한 감성의 스파크가 팍팍튀는 재기발랄한 활동가가 되어 있지 않고 냉철한 이성에 발 딛고 있는 제도권 법조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더구나 계획하기보다는 몰아서 일을 처리하는 편이라거나,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것이나, 행사나 일을 잘 주선하는 편이라는 점, 하기 싫은 것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구분이 커서 티가 난다는 점, 약속을 자주 잡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죽어도 안 한다는 그밖의 ENFP의 특징은 나와 별 연관이 없기도 하다.

사람을 인간형으로 범주화하고 특징을 미리 파악한다는 것은 선입견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백인백색인 사람들을 범주화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틀릴 가능성이 더 많다. 남을 범주화하는 것도 위험한데, 어찌 나를 검사결과로 단정할 수 있을까. 어찌보면 나에 대한 스스로의 선입견이 가장 위험하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많은 의뢰인들을 겪으면서 또 한 살 두 살 씩 나이를 더 배워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고유의 특징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저 함께 있는 지금 그 사람 자체를 느끼면 될 뿐이다. 그렇게 사람을 이해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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