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1. 변론종결

"지금 피고는 명백히 법률의 문언적 해석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자적 견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의 주장을 속히 기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측 변호사는 변론요지를 진술하고 자리에 앉았다. 역시 메이저 로펌 소속 변호사답게 변론에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단순명료한 원고측 변론에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짐짓 안색을 달리하며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추가로 제출할 증거가 있나요?" 판사는 표정으로 나의 무모함을 탓하고 있었다.

"없습니다. 입법취지와 법질서 전체와의 균형을 고려해서 판단해 주십시오." 그렇게 변론이 종결되었다. 재판정을 나오면서 원고 대리인을 보았다. '뭘 이딴 일로 시골에까지 재판을 하러 오게 만드느냐'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법취지'니 '균형'이니… 이런 추상적인 표현은 통상 패소하는 쪽에서나 할법한 변명같은 말들이었다.

#2. 미션 임파서블

이 재판은 의뢰인을 대리하여 진행한 사건이 아니라 법인의 파산관재인 자격으로 내가 직접 피고가 되어 진행한 사건이다.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소송비용 부담으로 파산재단에 손실을 초래하여 욕먹기 좋은 사건이다.

파산관재인은 파산 법인의 부동산이 경매되었을 경우, 임금 등 법이 정한 최우선 변제채권이 없으면 해당 부동산 저당권자에게 변제한다. 저당권채권자는 대게 은행이고 은행은 채권추심 관련하여서는 초고수다.

이 사건에서는 근로복지공단이 임금을 대신 지급했기 때문에 공단의 체당금 채권만 있을 뿐 임금채권이 없었다. 그리고 채무자회생법에는 저당채권에 우선하는 최우선 채권을 열거하면서 명시적으로 체당금 채권을 제외한다고 개정되어 있었다. 법령이 이렇게 명백해 보인 탓에 파산법인의 부동산이 경매되었을 경우 당연히 저당채권자인 은행이 체당금 채권에 우선하여 변제 받아왔다.

그런데 나는 은행에 돈을 주지 않았다. 체당금과 임금은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체당금도 최우선 변제되어야 한다고 판단해서 근로복지공단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매라는 우연한 사정이 채권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채무자회생법 규정을 그 법문장에 한정해서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며 기존 업무프로세스에 반기를 들었다.

무명의 변호사의 뜬금없는 반기에 은행은 황당해 했다. 은행 자문 로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심 법원의 태도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중꺽마

파산관재인에게는 관행화된 업무 프로세스를 뒤엎을만한 실리적 이유가 딱히 없다. 정해진 보수만을 받기 때문이다. 행여 관행에 반기를 들어봐야 사회적 강자인 은행과 그들이 선임한 메이저 로펌의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 뻔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고, 그렇게 무모한 변호사는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둔다면 공단의 체당금 재원은 빠르게 고갈될 것이고 이를 채우기 위해 고용보험료 인상으로 국민의 주머니를 뒤질 것이 분명했다. 품속에서 계란을 꺼내 바위 던지기로 했다. 그렇게 체당금과 근저당채권의 변제순서에 관한 대한민국 1호 사건 주인공이 되었다.

1심에서 패소했다. 판결문에는 나의 무모함을 탓하는 문장이 가득 담겨있었다. 원고측 주장대로 내 논리는 나만의 독자적 주장으로 가볍게 배척되었다. 완벽한 패소였다.

아프지 않았다. 이제까지 원고의 주장에 동의의 눈빛을 보내고 나의 주장에는 연신 고개를 가로졌던 판사의 태도에서 1심에서 내가 질것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멈춰도 나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중꺽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즉시 항소했다.

#4. 법을 찾아서

정의의 여신 디케는 말한다. '너는 사실을 말하라. 나는 법을 주리라(Da mihi fatum, dabo tibi ius)' 법정에서 판사는 디케가 되어 사실을 말한 당사자들에게 법과 그에 따른 권리를 준다. 1심은 내게 '그런 법은 없다'고 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숨겨진 법을 찾아 디케에게 알려줘야 했다.

법의 참뜻은 법을 만든 자들의 뜻이다. 그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국회 의사록을 샅샅이 뒤졌다. 법령의 제ㆍ개정시 입법자들 토론 내용을 확인했다. 이를 근거로 법을 단편적으로 그릇 해석한 1심의 판단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법규정을 단편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입법 취지와 목적, 연혁, 법질서 전체와의 조화, 다른 법령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는 체계적ㆍ논리적 해석을 통해 법적 안정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체적 타당한 해석을 하여야 하므로 체당금이 저당채권에 우선하여 변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항소심 판결문에는 내가 주장했던 숨겨진 법이 확인되어 있었다. 원고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최후의 공방이 오갔다. 대법원의 고민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쳐갈 무렵 승소소식이 전해졌다. 짜릿했다.

#5. 미션 컴플리트

물적ㆍ인적 자원이 풍부한 상대방의 물량공세, 1심 패소, 주변의 무관심, 오랜 기간, 이 모든 것은 소송을 포기할만한 이유가 되었다. 무엇보다 명백해 보이는 법률 규정 때문에 이 소송은 법적인 시각에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인지 소송과 직접 관련있는 근로복지공단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선고대로 체당금을 포기하고, 구멍난 제정을 고용보험료 폭탄을 터트려 메우면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조직에서 버림받은 이던 헌트가 홀로 얇은 끈에 거꾸로 매달려 정보를 캐듯 국회 의사록을 뒤졌고,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듯 무모해 보이는 법리를 펼쳤고, 헬리콥터에 매달려 적을 쫒듯 포기하지 않고 항소했다. 결국 터지기 일보직전 기적처럼 고용보험료 폭탄을 제거할 수 있었다. 미션 컴플리트.

내 앞에 어떤 무모한 사건이 있을지 솔직히 두렵기는 하다. 하지만 도전할 가치있는 사건이라면 언제든지 응하고자 한다. 소송 임파서블 시즌2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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