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꽃그늘 아래에서 서성거린다. 푸른 하늘에는 크림색 꽃송이가 가득하다. 마치 꽃등을 켜놓은 듯 환하다. 순간 바람결에 꽃잎이 흔들리며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 이렇듯 향기를 뿜는 꽃등이 어디에 또 있으랴. 꽃등이 저절로 켜진 것은 아니다. 꽃들이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 하늘을 수놓은 덕분이다. 아니 꽃의 여신은 겨우내 빈 가지에 털북숭이 꽃봉오리를 피우고자 수백 일 그리워했으리라. 목련화 하늘을 목 놓아 기다린 끝에 닿은 것이다.

꽃그늘 아래 서니 고흐의 '아몬드 꽃'이 떠오른다. 고흐도 나처럼 꽃그늘에 들었으리라. 잎도 없는 나뭇가지에 흐드러진 흰 꽃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렌즈의 초점을 맞춘다. 눈물이 날 정도로 푸른 하늘을 수놓은 무량한 꽃들에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우윳빛 꽃송이가 시야를 흐리고, 은은한 꽃향기가 숨겨둔 무의식 속 심연을 건드린 듯하다. 꽃의 초점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잡히질 않는다. 목련화로 수놓은 하늘과 유화로 그린 아몬드꽃 그림은 몽환적 분위기로 이끈다.

명작 「아몬드 꽃」은 반 고흐(1853~1890)가 죽던 해에 동생 테오의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그린 작품이다. 아이가 태어나자 삼촌이 된 고흐는 조카가 생긴 기쁨에 꽃 그림을 그려 선물하였단다. 그림에 조카를 기다리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 그런가. 아니면 고흐의 애정이 전이되었던가. 그림 속 맑은 하늘색을 좋아한 조카는 청년이 될 때까지 이 그림을 침실에 걸어두고 보았단다.

남프랑스의 아몬드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이끌리듯 뇌리에 자리 잡은 꽃이다. 아몬드꽃의 느낌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손에 잡히지 않는 애잔함이 서린 '그리움'이라고 말하련다. 꽃의 슬픈 전설을 알고 있어선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모폰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필리스와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다. 필리스는 집에 다녀온다는 데모폰을 기다리다 지쳐 숨을 끊는다. 지독한 그리움의 결정체인가. 그녀를 묻은 자리에서 아몬드나무가 아름드리 자라난다.

사랑의 신은 참으로 얄궂다. 데모폰이 돌아와 그녀를 찾으나 그 자리에 아몬드나무만 우뚝 서 있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인 양 나무에 입을 맞추니 봇물이 터지듯 가지마다 꽃잎이 하얗게 돋아났단다. 반 고흐가 그린 아몬드나무 꽃처럼 피어나 더욱 그녀가 보고 싶어 애달팠으리라. 필리스가 사랑하는 데모폰을 목 놓아 기다리고, 고흐가 태어날 조카를 기다리듯 막연한 그리움이 낳은 기다림의 꽃이다.

꽃은 참으로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낳는다. 정녕코 한 송이 꽃을 피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시린 동토에서 새싹이 돌올한 모습이나, 고목 나뭇가지에서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는 형상을 본 사람은 알리라. 자연의 몸짓은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품게 한다는 것을. 돌아보니 헐벗은 나목에 등불처럼 꽃을 피워 주위를 따뜻하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위인이 여럿이다. 정신적 아픔과 처절한 삶의 역경 속에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고흐도 그중 한 사람이다. 태어날 사랑스러운 조카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행복했으리라. 정녕 기다림은 그리움을 넘어 꽃이 되고, 그 기다림은 명작을 낳는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삶일지라도 잠시 잠깐 자연이 낳은 명작에 마음을 주길 바란다. 털북숭이 겨울눈으로 수백 날 인내와 기다림으로 꽃을 피운 나무. 꽃의 우아한 몸짓을 바라보며 고통을 이겨내길 비손한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온 누리가 결결이 봄꽃으로 맑고 향기롭다. 눈앞의 꽃 세계는 겨울이란 힘겨운 계절을 참고 버티고 이겨낸 선물, 삶에 의지의 결실이다. 막연한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가슴에 품어보길 원한다. 그 대상이 꽃이든 인간이든 다 좋으리라.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것' 하나쯤은 가슴에 품어야 헛헛하지 않으랴. 부디 자신만의 아늑한 꽃그늘을 만들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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