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그도 기어이 절제를 잃었나. 난 분분 꽃잎 떨구던 그 봄을 어쩌지 못해 노랗게 꽃을 피워 올렸다. 늘 절개와 올곧은 지조를 지키며 살아왔다. 봄까치꽃이 깨금발로 눈빛 반짝이며 소식을 물고 올 때만 해도 '아, 이제 봄이 오는구나' 반가워하던 그다. 앙증맞게 일어서는 풀꽃들이 대견하여 잎 한번 넓혀보지 못하고 평생 바늘잎으로 살았다. 모든 걸 내어주는 삶이다.

숲으로 들어섰다. 터질 듯 탱탱하게 물오른 잡목 잎사귀에서 숫처녀 살냄새 같은 풋풋함이 훅, 풍겨 온다. 그 숲에서 늘 당당하던 그가 오늘따라 한풀 꺾인 낯빛이다. 어떠한 자연환경에도 부화뇌동하지 않고 한결같이 군자의 모습을 지켜야 하는 것이 숙명이 되어 버린 소나무, 그도 숙명을 받아들이기에 유난히 버거운 날이 있나 보다.

화려했던 나무들이 견디지 못하고 꽃눈 잎눈 품속에 묻고 잠든 겨울, 그 매운 바람 살에도 꿋꿋하게 지켜온 푸른 명성이 때로는 멍에가 되기도 했으리라. 화사한 망울을 터뜨리는 꽃나무가 때때로 왜 부럽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사월, 꽃잎 여는 사그락거림도 없이 먼지 같은 송화를 노랗게 피웠나 보다. 훨훨 일탈 된 자유를 누리며 속을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송화는 수꽃에서 피는 소나무꽃이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각각 나뉘어 핀다. 위 가지에서 붉은색 솔방울 모양으로 둥글게 피어나는 것이 암꽃이요. 꽃가루를 가득 품고 버들개지 모양의 꽃밥을 다글다글 매달고 있는 것이 수꽃이다. 암꽃 아래에서 그보다 십여 일 앞서 꽃을 피운다. 근친 수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수한 종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다. 절제다. 군자의 풍모다. 한낱 나무도 이러한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사람 중에 이보다 못한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근친상간, 성 문제가 잊을만하면 툭툭 불거져 나와 어지러이 방송을 탄다.

소나무는 가루받이가 끝난 후에도 바로 수정하지 않는다. 암꽃은 가을까지 연두색 솔방울로 자라다가 이듬해 5월, 6월경에 비로소 수정한다. 다 자란 갈색 솔방울은 가을이 되어야 볼 수 있다. 솔방울 하나도 은근한 기다림을 거쳐 완성되는 걸 보면서, 때때로 조급증에 동동거리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송화에 눈길이 머문다. 꽃잎 하나 갖추지 못한 먼지꽃이다. 당신을 위해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먼지처럼 살다간 엄마꽃이다. 물가에 이르니 눈에 보이지 않던 송홧가루가 비로소 노랗게 결을 이룬다. '그래, 꽃이었구나.' 엄마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송화를 날아갈세라 치마폭에 고이 받아 다식을 만들어 먹였던 거구나. 티겁지 걷어내고 물에 가라앉혀 송진과 독성을 우려내는, 번거로운 과정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식 입에 넣어주는 먹을거리 하나하나가 거저 된 것이 없다는 것을 엄마 살아생전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런 수고로움이 엄마의 삶이려니 했다.

송화다식에는 기를 보호하는 약성이 있다. 혈액의 흐름을 좋게 하는 성분 외에도 몸에 이로운 효능이 여럿 있다. 송화다식을 입에 넣고 오물대면 씹을 필요도 없이 녹았다. 달근하고 쌉싸래함이 입안 가득 은근하게 스며들었다. 기억 속에만 머무는 맛이다. 다시 맛볼 수 없는 그리움이다.

곧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제사상에도 더는 송화다식을 만들어 올리지 않는다. 송화를 채취할 여력도, 가루를 물에 가라앉혀서 독성을 우려내며 기다릴 여유도 없어진 지 오래다. 아니, 어머니를 위해 정성 자체를 기울이지 않은 거다. 무성의한 내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마음이 송홧가루로 폴폴 날린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송홧가루는 언제부턴가 눈총을 받는 물질로 전락했다. 그도 다 생각이 있어 저리 날리는 것을……. 자동차가 더러워진다고 투덜댄다. 집안에 먼지가 든다고 창문을 꼭꼭 닫아건다. 심지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눈살을 찌푸린다. 세월 따라 시류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어디 송화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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