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사람이 살다 보면 뒤늦게 사실을 알고 무릎을 칠 때가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한 계기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벼락이나 맞은 것처럼 놀란다. 일어나는 감정은 둘 중 하나다. 아주 기쁘거나 슬프거나이다.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 정말로 기뻤다. 아니, 이럴 수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걸 썼단 말이야! 바로 최근 세상에 내놓은'논어의 숲에서 사람을 보다'라는 내 책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2천 년 대 초반, 방송에서 하는 논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바로 공영방송 KBS에서 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였다. 아, 그 어려운 논어를 방송에서 한다? 참으로 놀랐다. 거의 빠지지 않고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얼마나 재미있고 활력 넘치게 하는지 그냥 쏙 빠지고 말았다. 나의 논어 공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침내, 나도 논어에 관한 책을 한 권 써야지 하고 마음먹고는 집필 방향을 정했다. 바로 논어 전편에 나오는 군자를 주제로 삼기로 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이니,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를 탐구하기로 했다. 군자는 논어에서 86장에 걸쳐 정확하게 107번 나온다. 이를 하나하나 노트에 옮겨 적으며 확인하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3년 전, 시내에서 살다가 옥산의 한 아파트로 이사 왔다. 오로지 전원 아파트라서 삶의 터전을 이리로 옮겼지만, 와보니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앞으로는 미호강이 흐르고, 덕촌 독립운동가 마을이 있는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된 고장이었다. 바로 청주 소로리 볍씨! 그 모형물이 미호강 언덕 큰 도로 옆에 우뚝 서 있다. 거리 이름도 소로리 사거리다. 이 볍씨를 소재로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내심 소로, 소로 하며 이게 뭘까 살짝 궁금하기는 했었다. 그냥 작은길이란 뜻일까, 아니면 순우리말일까 하고 말이다.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그야말로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 내 졸저에 관한 기사가 났는데, 옥산 면장이 이를 보고는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고맙기도 하여 한달음에 달려가 내 책을 선물하였다. 면장이 앞의 머리말을 살펴보더니 소로리 지명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책 머리말 끝에'미호강이 흐르는 소로리에서'라는 구절을 보고 말하는 듯했다. 소로가 작은 노나라는 뜻인데, 여기서 논어를 쓰셨군요! 아, 정말이지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아니, 뭐, 뭐라고. 소로가 작은 노나라? 그럼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를 일컫는다! 그랬다. 정말 확인해보니 그게 맞았다. 그러니까 나는 소로라는 뜻도 모르면서, 머리말 끝에'소로리'라는 말을 감히 쓴 것이다. 단지, 소로리 볍씨가 유명하기에.

때는 바야흐로, 조선 제7대 임금 세조가 1464(세조 10)년 2월에 청주 초정약수를 들러 속리산 복천사 신미대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소로리 유적 안내판에는 온양 온천을 가는 중이었다고 적혀 있다. 어가가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세조가 한마디 한다. '아, 이 마을은 공자가 태어난 작은 노나라 같구나. 이렇게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이 때부터 이 마을 이름이 소로(小魯)가 되었다. 또 하나, 토정 이지함이 이 마을을 보고는, 동산에 오르니 작은 노나라를 보는 듯하다고 말해 소로가 되었다. 이 또한 공자와 관련되어 있다.

정말 놀랍다. 내가 여기 옥산 소로리에서 논어를 쓰다니. 그것도 코로나 3년 동안에 말이다.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세조의 귀에 잔잔하게 들린 소리가 논어 글귀가 아니었을까. 나는 논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지간히 논어 원문을 읽고 읊조렸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혹시 세조가 이 마을을 지날 때, 글을 읽었던 서생이 전생의 나였다면 지나친 환상일까. 그렇다면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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