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보은예총 회장

이화령 옛길로 올라 정상에 섰다. 눈앞에 펼쳐지리라 기대했던 주흘산은 물론이요 조령산 자락에 서서 조령산 정상조차 뚜렷하지 않다. 갈매봉 등 산천을 모두 품어 안은 는개 구름은 몽환적인 한삼자락만 한껏 펼친 채 느릿느릿 맴돈다. 옷을 다 적시고 이제 살 속으로 스며들 기세다. 넋은 어딜 갔는지도 모르는 지상여장군 장승이 되어 형체도 흐릿한 산들을 향해 서있는 여인, 몇몇 사람들에 어우러져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힐끔힐끔 하다가 아예 여인과 짝으로 천하대장군이 된 장승. 두 장승의 시공간은 피카소의 사고思考처럼 완전 추상적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30분입니다."

깜짝 지상여장군에서 깨어난 나는 오른 손을 가슴에 대며 나 말이냐는 시늉을 하자 가까이 다가 온 그분은 천하대장군에서 깨어난 카메라맨이다.

"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30분 동안 미동도 없이 서 계셨어요, 다리 굳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웃으며 하는 그의 말이 아니어도 한 발 떼어내기가 많이 거북스럽다. 그분이 잡아 준 덕분에 조금씩 움직인 후에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운동을 하면서

"긴 바늘이 그렇게나 많이 돌아간 줄 몰랐어요." 했더니 "그렇게까지 넋을 잃어버린 채 빠져들 수도 있군요." 그분은 무언가 궁금한 표정인데 대답이 선 듯 나오질 않아 한참 머뭇거리다가 "넋을 잃은 사람이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냥요 나를 찾고 싶었어요. 앞만 보며 세상넝쿨 헤쳐 나오다보니 눈앞에 'question이 나타나요."속마음을 내놨다. 그분은 미소 띤 표정이지만 비웃는 미소가 아닌 무언가를 찾은 듯 밝은 목소리로 "생각의 공간이 설게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사셨나봅니다. 아마 그 세상넝쿨이 부드럽고 여리진 않았으니 더 열심히 사셨겠지요." 그 말에 나의 허한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카메라를 어깨에 멘 그가 앞장서면서, 저기 찻집이 있네요, 우선 젖은 몸도 젖은 마음도 말리자며 따라오라고 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정신을 잡아준 건지 드디어 카메라맨의 모습이 보인다. 선할 선자의 선비 같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다문다문 색깔 조화를 이룬 모습이 친정 막내 동생과 비슷하다. 고마운 마음에 먼저 감사 인사하며 사진작가시냐고 물었다.

"작가라기보다는 그냥 재미로 찍으러 다닙니다. 선생님 혹시 시인이신가요?" 선생님이란 호칭이 남달랐고 혼자 예까지 온 동기를 말해야 했다.

"아침에 문득 소설가 펄벅께서 조선에 왔을 때 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소달구지를 비어두고 농부는 지개에 풀을 가득 지고 가는 상황에 소는 낮에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듣고 조선인의 마음 뿌리는 선량하고 곱다고 하셨다지요. 또 감나무에 매달린 까치밥의 뜻을 새겨듣고 감탄 하셨다는 거요. 자비와 배품 그리고 결 고운 민족성. 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 조상은 말 못하는 날짐승까지 진심 보살피는 무언의 교육을 대물림하셨잖아요. 그런 영혼을 그대로 우리 세대도 대물림해주지 못할까 은근히 작금의 사회가 염려스럽기도 하지요." 놀랍다는 기색으로 "그 생각이 자신을 찾겠다고 예까지 오시도록 강했습니까?" 그분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 행동이 의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생각은 아니다. 진솔한 농부도 못 되고 펄벅처럼 유능하지도 못하니 나를 찾는다는 의미는 정체성을 찾고 싶은 것이지만 생각할수록 막연해진 게다. 전부터 생각타래가 엉키면 목적지 없이 훌쩍 떠나는 습관대로 달리다가 이화령 옛길을 더듬게 된 것이다. 찾은 것도 없고 성취한 것도 없이 넋을 잃고 있었던 게다.

오계자 보은예총 회장
오계자 보은예총 회장

그분은 너무 깊이 파고들면 자칫 우울한 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다면서 "찾지 마소." 강하게 한마디 안겨주고 경북 방향으로, 나는 충북방향으로 내려왔다. 혼자 내려오면서 생각을 했다 '나를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훗날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조금씩 찾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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