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백련차에 꽃잎이 떠 있다. 입 안에 꽃향기로 가득 머금으니 코끝에도 여름이 온다. 멀리 굽이도는 강줄기가 보이고, 사공의 구성진 노랫가락 따라 금수강산은 수채화로 물들인다. 연꽃잎 차를 뜨거운 물에 담그고 죽마고우와 팔각정에 앉아 정이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꽃피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팔당호에서 연리지로 만나 한강으로 흘러 서해로 간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젖줄이 자랑스럽다. 한강의 옛 이름 아리수는 석기시대부터 대한민국 삶의 터전이었으며 한반도 심장의 강이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큰 강물의 범람으로 땅이 기름져 농사가 시절 따라 풍년이 들고, 중국과 가까워 문물교류를 할 수 있는 관문이기도 했다.

한강 8경 중 제1경으로 아름답고 멋진 곳이 두물머리다. 파아란 하늘에 둥실 떠가는 뭉게구름이 강물 속에 여울져있다. 남북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잃어버린 부모 형제를 그리며 눈물 흘리던 세월이 그 얼마인가! 어머니는 살아 계신지, 누이동생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목이 메어 불러보는 실향민의 애달픔이 남한강 줄기를 타고 두물머리로 들어온다. 헤어지는 이별의 눈물을 행주치마로 훔치며, 꼭 다시 만나자고 손 흔들던 북한강 물줄기도 소용돌이치며 이곳에 와서 잠시 머문다. 남녀노소 모두가 태극기를 들고 방방곡곡 골목길마다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소리치던 함성소리가 만남의 광장으로 달려오는 듯하다. 손잡고 흘러가는 한강물은 말없이 굽이쳐 흐르고 또 흘러가고 있다.

연꽃이 피는 세미원은 살아생전에 꼭 한번은 와서 보아야 한다는 관광명소로 꼽힌다. 세미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세진대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손을 씻는다. 불이문不二門을 바라보니 '하늘과 땅', '너와 나', '자연과 사람'이 둘이면서 하나라는 의미를 담은 태극문양이 보인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고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수련은 홍련지와 백련지에 가득하고, 수생식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다. 첫날은 희게, 둘째 날은 분홍색으로, 마지막 날 만개하여 3일 동안만 피는 빅토리아 수련은 세미원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송백정 앞에는 구부러진 소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세한도가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거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았다"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스승과 제자사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는 비밀스러운 언약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 이라는 인장을 찍어 놓았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이겠는가!

어릴 때 개울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목욕을 하며 물장구치던 시절이 생각난다. 더운 날이면 망태기 들고 꼴을 베어 담고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채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었다. 물속이 얼마나 깊은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손을 닿아보려고 하면 꼬맹이 계집애들은 킥킥거리고 웃음보를 터트린다. 무엇이 보였나 보다. 풀 섶에 손을 넣어 물고기를 움켜잡고 신이 나서 소리치며 즐거워했던 그 저녁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은 친구요 추억의 고향이요 시원한 생명수이다.

해바라기 꽃 피는 여름날이면 물안개 춤추는 강 언덕에서 젊은 연인들의 속삭임이 쌓여가고, 사랑의 노래가 익어갔다. 만산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흩날리던 가을밤엔 이별의 슬픔에 잠긴 여인의 흐느낌이 서녘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옛날 양수리의 나루터는 남한강 최상류의 물길이 있는 충북 단양과, 강원도 정선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마포나루, 서울 뚝섬을 이어주던 마지막 정착지라서 매우 번성하였던 곳이다. 빗방울로 떨어진 것들이 모이고 합쳐져서 강물이 되고 거대한 힘으로 강줄기를 따라 도도히 흐른다. 물은 순리를 지키며 웅덩이를 가득 채운 후 흘러간다. 흘러가다가 산과 바위를 만나는 어려움이 있을 땐 돌아갈 줄 아는 여유도 있다. 우리네 인생의 삶도 순리대로 돌아갈 줄 아는 물과 같이 살수는 없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 임을 싣고 사랑 싣고 아리수 아라리오. /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첫사랑 묻어놓은 그날 그 자리 / 그리우면 돌아오세요. //"

노래가 정겹게 들려온다. 두물머리 말죽거리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빈 나룻배에 세워진 황포돗대만이 노을 따라 흐느낀다. 물이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물이 있어, 아리수 나그네는 더불어 살아가는 감동의 눈물에 젖는다.







▷백련차: 연꽃은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을 가볍게 하여 얼굴을 늙지 않게 한다. 오래도록 마시면 인체의 온갖 병을 낫게 하고 몸을 좋게 한다. 특히 하혈을 멈추게 하고 피를 맑게 해주어 산모에게 좋다. 또한 몸의 지방을 분해하여 비만해소에 이롭다.-동의 보감

▷아리수: 아리수는 크다는 의미의 한국어 '아리'와 한자 '수(水)'를 결합한, 고구려 때 한강을 부르던 말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오래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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