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권택인 변호사

"권변호사님 축하합니다~ 대박 나시겠어요." W가 부장판사로 승진하면서 청주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날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을 무렵 나는 여러 변호사님들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법조계가 워낙 좁은 곳인지라 나와 W가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동문친구가 고향으로 발령된 것이 내가 이토록 축하받을 일이란 말인가?

이유를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과거 법원에는 초임 부장판사는 영장전담을 하는 묵시적 관행이 있는데, 그 판사와 인연이 깊은 변호사에게 영장사건이 몰리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사건의 수임료는 부르는 게 값이라 한다. 그렇게 W의 발령과 나의 경제적 이득이 연관 지어졌다.

"잘됐네요."라고 대답은 하였으나 '씨도 안 먹힐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W가 다른 법원에서 근무할 때 W가 나와의 관계를 검색한 어떤 변호사가 W와 나와의 인간관계를 물으며 공동 수임을 제안해 왔으나 "그냥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을 뿐"이라고 이야기 하고 수임을 거절한 적도 있다. 그는 재판 외에서 W와의 인연에 기초한 사건 처리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의한(正義漢). W는 판사봉 보다 정의봉이 어울릴 만큼 융통성 없는 판사다. 연줄을 동원해서 재판 외에서 선처를 호소해 봐야 '법대로 한다.'는 답변과 함께 인간관계 손절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 대단히 바른 사람은 아니어도 개인적인 인연에 기대어 사건에 특혜를 바랄만큼 싸구려 변호사가 아니다. 또한 변호사로서의 실전능력에도 자만심에 가까운 자부심이 있던 터라 W가 특혜를 주려해도 내가 먼저 거절할 판이었다. 나는 단지 친구의 금의환향이 기뻤을 뿐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W에 대한 소문은 법관 인사 발표와 함께 현실이 되었다. 세간 소식에 빠른 몇몇 친구들은 W의 재림(?)을 친구들에게 공지했다. 지인 변호사님들의 장밋빛 전망과 반대로 내 친구들은 이제까지 장난꾸러기로 일평생 즐겁게 살아온 나에게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상했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여러 버전의 기억. 변호사를 업으로 하면서 수많은 사건 속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랬다. 도대체 같은 사건을 겪었는지조차 의문이 들만큼 기억이 다른 경우가 많다. 문제되는 사건이 터지기 직전까지의 각 당사자의 기억은 꿰어 맞추면 맞출수록 미궁에 빠지기 일쑤다. 신기한 것은 각자의 기억은 그들의 개인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모두 진실 같게 느껴지는 모순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W의 등장과 함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와 W는 학교에서 전혀 다른 계열에 속했다. 나는 장난꾸러기 정체성을 늘 유지했고, W는 전교1등을 유지하는 모범생이었다. 나와 W는 학창시절 대부분의 시간과 생활공간을 같이 했지만 관심분야가 전혀 달랐기에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 장난 쳐봐야 교과서적인 심심한 반응이 예상되는 모범계열 W는 당연히 나의 장난 타겟이 되었을 리도 없었다.

학창시절 내가 수행한 장난들 대부분은 매우 창의적이었고, 나중의 반전에 모두들 웃어줬으며, 하나하나 정성을 들인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장난 철학은 피해자를 만들지 말자였기 때문에 나의 장난에 누군가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W가 청주로 온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W와의 사건까지 기억해 내고 있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의 기억의 시작은 '너야 장난으로 그랬겠지만…'이었다. 장난치는 낙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었다. 내가 친 장난으로 인해 W가 곤란해 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내 장난의 희생자에서 나를 판단하는 입장인 판사가 되어 돌아온 W의 등장에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친구들은 성공한 이몽룡이 마패를 들고 어사 출도를 외칠 때 당황한 변학도의 모습에 나를 비유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관행이 깨졌다. W는 초임 부장판사임에도 영장전담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문 듣고 찾아와 인맥으로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청탁하는 의뢰인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W가 청주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안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 W의 재판부 사건은 가급적 선임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임하게 되면 서면에 내 이름은 빼라고 하였다. 그것은 친구가 사법적 판단을 하는데 어떠한 부당함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같은 지역 같은 업계에 있었지만 재판정에서 판단을 하는 자와 판단을 기다리는 자라는 애매한 상황에서의 만남은 한 번도 연출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온 W에 대한 나의 배려이기도 했다. 나의 배려가 지나쳤는지 한번은 W는 자신이 진행하는 재판에 내 가 계속 안보이자 재판중에 "왜 권변호사는 재판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소속 변호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W가 나의 영역에 있는 동안 누구도 사석에서 조차 우리의 과거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내 장난에 대한 W의 판결은 미결로 남겨진 채 W는 고향 법원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얼마 전 서울 재판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 그곳에 근무하고 있는 W의 판사실에 들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W가 "너는 유쾌하고 활동적이어서 사무실에서 따분하게 일해야 하는 판사를 했으면 힘들어 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변호사의 스트레스도 무척 심하다고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 내가 검사가 되었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까?"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나의 말에 W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항상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 남의 잘못을 들춰서 아프게 하는 일은 절대로 못했을 거다. 검사는 어울리지가 않아. 힘내라. 너에게 변호사라는 직업이 너무 잘 어울린다." 그렇게 W는 학창시절 나의 짓궂은 장난에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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