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여름 휴정기를 앞둔 어느 날 시골 법원에서 재판을 허탕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변호하는 사건에서 무죄의 기운이 강해지자 검찰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검찰의 저항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먼 길을 달려가 출석한 재판은 허무하게 연기되었다.

'이렇게 재판이 공전될 것이었으면 차라리 연기해주지…' 평소 같았으면 법원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을 법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순한 양이 되었다. 사실 휴대폰 메시지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투덜거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오늘 선고가 3건이나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짐짓 얌전히 재판을 끝내고 부정한 기운이 나를 감싸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였다. 결과가 나오면 전화가 빗발칠 것이 경험칙상 분명했다. 승소하면 승소한대로 패소하면 패소한대로 의뢰인에게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은 이동 상담을 염두에 두고 저속으로 달려도 되는 국도를 택했다.

긴장을 줄이기 위해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운전에 열중했다. 얼마 전 폭우로 상처입은 풍경이 눈에 들어올 무렵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타이밍상 오늘 첫 번째로 선고가 예정되어 있던 의료소송 사건 결과를 알리는 문자임이 분명했다.

급히 차를 세우고 내용을 확인했다. '1.제1심판결중 피고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그 취소부분에 해당하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원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3.소송총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일부 패소했던 1심 결과가 뒤집혀 항소심에서 전부승소했다.

이 사건은 내가 병원 측을 대리해서 진행한 소송이다. 병원의 자문변호사로 일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병원장인 의사와 인간관계로 얽혀있기도 한 터라 더욱 결과에 예민할 수밖에 없던 사건이었다.

어떤 환자가 다른 병원에서 수술받고 의뢰인 병원을 찾았다. 그는 통증치료와 재활을 목적으로 전기신경자극(TENS)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수년 흐른 뒤에 복합부위통증증후근(CRPS)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환자는 병원에서 시행한 TENS가 CRPS의 원인이 되었다면서 병원을 상대로 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TENS는 대부분의 병원에서 통증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TENS는 환자에게 발병했다는 CRPS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환자는 피고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 재활목적으로 수년간 TENS 치료를 받았고, 그로 인해 기왕 통증이 호전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CRPS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여지는 다른 사고도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의뢰인만 콕 집어서 책임을 물었다.

1심 법원에서는 원고가 청구한 금액의 대략 1/3가량을 배상하라는 취지로 판결했다. 하지만 판결문은 나를 법적으로 설득하지 못했고 병원을 의학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돈 잘버는 의사가 고통받는 환자에게 적당한 돈을 줘야하지 않겠느냐는 느낌이 강했다. 약자는 선하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하여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마무리된 판결문 같았다. 낭만적인 판결문에는 견고한 법리가 결여되어 있었다.

의사들은 의료소송을 겪으며 청구금액에서 상당 금액이 감경된 판결이 나오면 항소를 포기하고 조용히 끝내려는 경향이 크다. 병원의 평판 때문이다. 하지만 TENS로 인한 병원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면 대한민국 수많은 병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에 이 건은 반드시 항소해야 했다. 1심에 일부 패소했지만 이 소송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기에 감히 나에게 항소심을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의뢰인은 패장인 나에게 또다시 신뢰를 주었고, 결국 항소심에서 1심 패소 부분을 뒤엎고 승소하는 것으로 신뢰에 응답했다.

의뢰인에게 사건 결과를 보고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휴대폰에 문자알림 진동이 울렸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문자를 확인했다.

의뢰인은 미개발 토지를 사들여 개발행위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가였다. 사업예정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1/10의 계약금을 지불한 후 개발행위에 착수하였다. 이후 매도인측에서 다른 매수인을 물색하고 다니면서 잔금 수령을 거절하며 토지 인도를 거절하였다. 매도인의 이행거절에 매수인은 매매계약을 해제하고 계약금반환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처음 들을 때와 약간 다른 면이 있는 사건이었다. 계약상대방이 3인이었고, 매수인은 2인이었다. 당사자가 많은 계약이었던 탓에 해제 통지가 깔끔하지 못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재판 중에 부동산 시장 상황이 악화되었다. 상대방이 매수인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우리 측 해제 통지의 오류를 지적하며 의뢰인이 부동산을 인수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재판부 역시 우리가 토지를 인수하여 원만하게 종결되기를 바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소송에 이르기 전까지는 원만한 해결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로 조정이 결렬되어 '법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냉정해진다. 이 사건도 그랬다. 교섭과정에서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다 소송이 제기되고 상황이 바뀌자 태도를 바꾸는 상대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법대로 했다. 승리했다. 2연승.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사무실로 복귀했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오후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아들을 잃은 시부모가 다른 사람을 통해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그들의 친손자에게 제기한 민사소송이었다. 조부모가 친손자들에게까지 돈을 내놓으라는 재판을 하는 것도 드문일이기도 하거니와, 재판을 진행하면서 보인 태도와 주장 내용은 가관이었다. 의뢰인은 괴로워했다. '재판 과정이 참혹하니 그냥 결과를 기다리고 계셔라, 꼭 필요한 연락만 할 테니 그냥 잊고 있으면 내가 책임지고 이겨드리겠다'고 의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뢰인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가량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선고일. 승소했다. 의뢰인에게 이같은 승소가 마냥 좋은 일이기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간단히 문자만 남겼다. '승소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3연승.

이제 내 머릿속에서 3개의 사연을 지울 시간이다. 머릿속을 소란하게 만들었던 수많았던 감정들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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