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석인상
석인상

갈맷빛 숲속의 하얀 집은 그림 같다.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詩)"라 여겼던 김수군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청주박물관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다.

매스 미디어가 앞다투어 알려준 「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놓칠세라 사전 예약을 한 터이다. 입구의 관모를 쓰고 도포를 입은 석인상이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 저 석인상도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석조문화재 중 야외 정원 사이사이에 재배치한 210여 점 중 한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기에 아이들 장난감 같은 청동 방울 앞에 섰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국보란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제사장이 주술에 사용한 도구로 사용자의 권위와 힘을 상징한 가치가 높아서인가 보다. 포탄 모양의 간두령, 방울이 두 개 달린 쌍두령, 방울이 여덟 개 달린 팔주령의 몸체 가운데 +자 문양이 있는데 이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금속 문화재 특화 박물관인 국립청주박물관에 가장 맞춤한 전시품이 아닐지….

청풍 부사로 부임한 윤제홍이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봉을 다섯 개의 봉우리로 다채롭게 그린 구담봉도는 '웅장하고 막힘이 없으며 특별하고 기이하다.'라고 그림 왼쪽에 적어 놓았다. 조선시대에 웬만한 선비라면 제화시정도는 요즈음 트로트 흥얼거리듯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하여 확대하고 물체를 생동하는 이미지로 다가오게 했다.

인왕제색도
인왕제색도

가장 기대가 된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다가왔다. 인왕산의 장마 후 개이기 시작하는 전경을 담은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국보이다. 진한 먹을 묻힌 붓으로 물기 머금은 웅장한 상태의 치마바위를 그렸다. 범바위는 인왕산 호랑이가 엎드린 듯한 모습이고 수성동 계곡은 붓질을 더 하여 그늘진 골짜기로 표현했다. 코끼리 바위와 푸른 단풍나무가 있던 청풍 계곡 등을 먹으로만 그렸는데도 푸르스름한 빛이 나서 신기했다. 정선은 인왕산 북쪽인 북악산 아래 지금의 청운동에서 52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고향 인왕산이 늘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이다.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에는 청초한 대나무가 청화 안료로 그려져 있다. 장식이 없는 백자 사발의 굽 안 바닥에 천(天), 지(地), 현(玄), 황(黃)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색이 눈부시게 희고 유약이 맑고 투명한 조선의 최상품 백자로 국보이다.

그 외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광배와 금동보살삼존입상, 장석과 나뭇결의 조화가 멋스러운 반닫이에 눈길이 많이 갔다. 관람하고 나오며 대강당에서 석조문화재 운반부터 세척, 배치 작업 과정의 10분짜리 동영상을 보았다. 정원에 무심하게 서 있는 돌장승, 문인석, 무인석 등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곽응종 선생 공적비
곽응종 선생 공적비

나오며 곽응종 선생 공적비를 톺아 보았다. 국립청주박물관 건립을 요청하자 충청북도에서 먼저 부지 3만 평을 희사하라 했다고 한다. 곽응종 선생이 공익을 위해 평생 피땀 흘려 이룩한 부지를 쾌히 기부함으로써, 명암지가 내려다보이는 배산임수의 터에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두 분은 1987년 준공을 하기 전 타계해 개관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재벌 회장으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이 수집한 문화재를 나눔의 철학을 실천하여 기증함으로써, 사후 빼어난 안목을 칭송받고 이름에 귀티를 더했다. 재벌이니 원하는 것을 다 갖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식같이 아끼던 수집품이다. 그는 수집한 문화재를 먼저 둘러보고 대화를 나눈 후 출근하곤 했다고 한다.

삼라만상 물건 곳곳마다 정성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다. 미래를 내다본 기획에 곽응종 선생의 통 큰 기부, 한국건축협회의 수상 작품이 되게 한 빼어난 설계. 거기다 이건희 회장의 기증까지 보이지 않는 손들의 상승작용처럼 합심으로 오늘의 초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나는 근본적으로 문화를 좋거나 나쁜 것으로 우열을 비교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란 단지 다를 뿐이다. 현재 우리 문화의 색깔이 있느냐, 우리 나름의 정체성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했다는 그 분의 말씀을 음미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갈맷빛 정원의 석인상이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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