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노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선선한 가을바람에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계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가을을 이야기한다. 봄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적당한 온도의 계절, 그러나 짧아서 더욱 아쉬운 계절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필자는 가을의 매력을 다 알고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여름이 너무 길어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가을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이 계절이 주는 반가움과 설렘은 어디서오는 것인지 생각해보다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낯선 새로운 학기의 봄과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는 익숙하고 가까워진 친구들과 가을 소풍을 떠난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 다 같이 넓은 운동장에서 뛰놀며 가을운동회를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진 어린아이의 마음은 다자란 성인이 되어도 나도 모르는 새 기분을 들뜨게 한다.

이렇게 어릴 적 추억을 들여다보니 어디선가 울려 퍼지던 하인리히 베르너(Heinrich Werner,1800~1833)의 '들장미(Heidenr slein)'가 떠오른다. 1771년 독일 고전주의 대표인 문학가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쓴 시(詩) '들장미'에 곡을 붙인 가곡으로 들장미의 아름다움과 소년의 순박함이 담긴 서정적인 노래이다.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쉬워서인지 학교에서 많이 부르곤 했다.

한 소년이 보았네/들에 핀 장미/싱싱하고 아침같이 예쁜 장미/소년은 가까이 보러 달려가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네/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소년이 말했네/"난 너를 꺾을 거야. 들에 핀 장미야."/장미가 대답했네/"너를 찌를 테야/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그리고, 참지만은 않겠어."/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소년은 들장미를 꺾었네/장미는 자신을 지키려고 저항하며 찔렀지만 탄식도 신음도 소용없는 것/고통을 당해야만 했네/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이 시는 괴테가 스트라스부르 대학시절 인근 마을의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Friederike Brion)을 사랑할 때 쓴 시로 그녀를 사랑해 결혼을 약속하지만 괴테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고 프리데리케를 떠나면서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에 죄책감을 느낀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이 시는 베르너뿐만 아니라 많은 음악가들이 곡을 붙였는데 그 중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1797~1828) 역시 이 시에 곡을 붙였다.

독일 낭만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가곡(歌曲)을 작곡했다. 여기서 가곡이란 시와 음악이 결합 된 음악 형식으로 독일어로 리트(Lied)라고 불리는데 베토벤이 그 문을 열고 슈베르트가 완성을 시켜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 주요한 음악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14세 때부터 가곡을 작곡한 그는 평소 문학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괴테나 프리드리히 실러, 하인리히 하이네 같은 대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시에 곡을 붙이며 31년의 생애동안 무려 600편이 넘는 가곡을 작곡했다.

정혜연 플루티스트
정혜연 플루티스트

슈베르트는 1815년, 그 해에만 무려 145개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당시 작품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들장미'와 '마왕'이다. '들장미(Heidenr slein D.257)'는 그가 빈 교외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쓴 작품으로 소년에게 꺾이는 장미의 비극적인 모습과는 달리 음악은 4분의 2박자의 G장조로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슈베르트는 곡에 '사랑스럽게(Lieblich)'라는 지시어를 붙이며 곡의 의미를 더 확실히 하면서 시와 곡의 균형을 이뤘다. 또한 이 곡은 3절로 이루어진 유절가곡(有節歌曲)형식이다. 유절가곡이란 시의 각 절을 모두 같은 멜로디로 반복하는 형식의 가곡인데 대부분의 가곡이 이런 형식을 갖고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형식의 가곡이 존재하는데 '마왕 작품번호 1, D.328'의 경우 통작가곡(通作歌曲)으로 시의 각 절마다 다른 멜로디가 붙은 가곡이다. 이는 시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으로 되어 있을 때 적합한 가곡형식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Die Winterreise)'는 일련의 정돈된 시집에 연속적으로 곡을 붙인 가곡으로서, 음악적으로도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다양한 가곡 형식은 후에 슈만이나 리스트 등 독일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0월의 탄생화 들장미의 꽃말은 신기하게도 시(詩)다. 어린 시절 동시(童詩)를 쓰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를 추억하며 청명한 이 계절에 슈베르트의 가곡과 함께 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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