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삶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팔십을 앞둔 한 분의 인생이야기를 오래 들었다. '백인백색'이라고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느 시대인들 살만하다고 할까마는 해방과 함께 격랑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청주의 한 모퉁이를 꿋꿋이 지켜온 삶이 무척 존경스럽다.

시골에서 태어난 삶, 주어진 운명이었다. 부모님은 남의 땅에 이방인으로 밭 가운데 허름한 집을 짓고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조금씩 땅을 늘리는 것 밖에 없었다. 여섯 아들 딸 하나의 넷째로 태어났다. 약한 몸에 강한 승부욕, 쉽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학교를 그만 둔다. 세상살이에 한문은 알아야지 싶었다. 일 년여 서당 두어 곳을 다니며 한자를 익혔지만 그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60년대에 몰아친 산업화는 '기술을 배워야 산다'는 부친의 말씀에 힘을 실어 주었고 농촌 청년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두 개의 선택지는 '철공과 이용'이었다. 자신의 체력과 작업환경을 고려해 고른 이용,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주 율량동으로 온다. 정식 사장과 종업원도 아니고 정해진 보수도 없는 견습생 신분의 세월이 편했을까? 주변동료들 말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서울 부산 공주 전동을 전전했지만 인간다운 대우는 어디도 없었다.

갓 스무 살 넘어 이용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군 생활을 한다. 차라리 군대가 편하지 않았을까. 자기기술로 비슷한 연령대 젊은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 사회와 무언가 다른 기준으로 돌아가는 곳이 군이었다. 자기 일에 만족이 어렵고 속히 벗어나고픈 곳이 군은 아니었을까? 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하고 다시 처음 기술을 익혔던 청주로 온다. 그 해가 1970년,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반백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열 평이 되지 않는 이용원을 지키고 있다. 세 딸 한 아들을 기르고 37년간 하루같이 산 아내와 사별하고 15년간 통장 일을 해 왔다. 파란만장한 나라의 근현대사를 한 발 비켜나 스스로의 일에 몰입하며 살아왔다.

그 세월 동안 손님들 머리만을 손질하면서 왜 곁눈질하고 싶지 않았으랴. 남의 떡이 커 보이기도 했을 게다. 그 힘겨움을 휴무일에 쏟아 부어 산을 헤매기도 하고 노랫가락에 빠져보기도 했다. 이용원도 땅은 교육부에 속한 학교부지로 건물만 소유할 수 있어 불안했다. 학교는 계속 건물 기부를 요청해 마침내 몇 년 전 기부를 약정했다. 오래전에는 서운한 요구를 수용하기도 했었다. 모든 것이 힘없고 못 배운 탓이려니 생각했다.

십오 년여 통장 일은 열정으로 지역 속에 스며들게 해주었다.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일들을 했고 나름대로 바르게 하려 애썼다. 가난한 환자 치료에 발 벗고 나섰고 좋은 주거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어려운 가정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한 자리를 지켜온 50년이 넘는 세월, 형제들 중에 청주와 근방에 사는 이들이 몇 있고 자녀들도 다 청주에 산다. 한 곳에 오래 살다 보니 생각지 않은 분에 넘치는 인사를 받을 때도 있다. 외국에 사시는 어르신도, 멀리 떠나 있던 분들도 고향에 오면 이용원에 들러 옛 추억들을 선물해 준다.

올 해초, 이용원이 청주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시민들이 선택했다는데 어떤 의미일까? 그 덕에 몇 번 방송을 타고 신문에 나기도 했다. 미래 문화유산이면 오래 보존해야 할 텐데 막상 그분이 손을 놓으면 얼마나 더 유지 될지 불안하다. 유지보존방책을 빨리 찾으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 같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그 분은 내년이면 팔순이다. 2010년 이후에 심장수술과 뇌경색을 겪었지만 지금도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용원으로 출근하신다. 주변에 눈 돌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오랫동안 해오며 청주의 한 모퉁이를 지켜왔다. 대단한 이들보다 자기 일밖에 모르는 평범한 이들이 우리 사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주역들이 아닐까?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런 분들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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