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재의 클래식 산책]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에곤 쉘레 '네개의 나무가 있는 풍경'(1917년)
에곤 쉘레 '네개의 나무가 있는 풍경'(1917년)

계절은 기온의 변화와 함께 찾아온다. 봄은 차가우나 따사로움이 묻어나는 온기와 함께 찾아오지만, 가을은 이와 반대로 따사로우나 서늘함이 느껴지는 냉기와 함께 찾아온다. 가을의 징후들은 다양하지만 '브람스'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면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래와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우리들은 가을이 오면 일종의 '의식'이나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습관적으로 브람스의 음악을 듣는다.

가을에 우리는 왜 브람스의 음악을 듣는 것일까? 가을을 의식하고 작곡하지 않았지만, 브람스의 음악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짙은 색채감이나 깊은 고독함과 같은 가을 특유의 정서 때문일 것이다. 브람스의 다른 음악에서도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그가 작곡한 4개의 교향곡에서는 가을이 품고 있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소박함과 청량함, 고독과 우수, 쓸쓸함과 외로움과 같은 모든 감정이 교향곡의 순서대로(1번∼4번) 드러난다. 풍요로운 초가을부터 스산한 늦가을까지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심경의 변화와 같다.

우리는 브람스의 음악을 가을의 전령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게 브람스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같다. 브람스를 유명하게 한 것 중 하나는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일 것이다.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년 여인의 연애기다. 놀랍게도 소설에서 브람스와 관련된 것은 책의 제목과 주인공이 교제하고 있던 젊은 연인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받게 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뿐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였던 낯선 질문을 받고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프랑스인들에게 브람스 음악은 '낯섦'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형식과 전체를 중시하는 독일문화의 상징과도 같아서 브람스를 좋아하는 것은 절망적인 시도라 한다. 그래서 프랑스인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소설의 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같이 '…'로 끝나는 모호하면서도 깊은 성찰이 필요한 난해한 질문이다.

생각해 보면, 가을마다 습관처럼 듣고 있는 브람스의 음악은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 아니다. 우울하고 답답하며, 형식적이고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을마다 브람스를 듣는 것은 브람스 음악이 주는 묘한 위로감 때문일 것이다. 브람스가 평생 존경하면서도 넘어서려 하였던 베토벤의 음악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드높은 꿈, 숭고한 이상 및 지고의 사랑을 노래한다. 위대하고 비범한 베토벤의 음악은 수많은 음악가에게 꿈과 용기를 주었지만, 실망과 좌절도 안겨 주었다. 브람스가 제1번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지 22년 만에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베토벤을 극복할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음악이 '피안(彼岸)'의 진리라면 브람스의 음악은 '차안(此岸)'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브람스의 음악은 차안의 현실에서 베토벤이 바라보았던 별을 보며 꿈을 꾸다 실족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다.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꿈을 이루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일상을 버티는 것 역시 가치가 있으며 어쩌면 더 위대한 것임을 진지하게 알려 준다.

봄에 꾸었던 꿈과 계획을 가을에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브람스는 우리를 탓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에 브람스를 듣는 것이리라. 브람스는 인생의 모토(Motto)였던 '자유롭지만 고독하게(Frei aber Einsam)'의 정신에 따라 작곡하였지만, 우리가 그의 음악에서 '고독하지만 자유롭다(Einsam, aber Frei)'는 느낌을 받는 것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스웨덴 소설가 헤닝 만켈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우리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나는 질문으로 가득할 때 내 얼굴이 가장 진실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브람스의 음악은 사강의 소설 속 질문처럼 가을마다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의 질문이다. '얼마나 성취하고 성공하였느냐?'가 아니라 '얼만큼 성숙하고 성장하였느냐?'는 질문으로 가득한 가을의 진실한 얼굴인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세상은 변하고, 그 순간의 미래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확실한 것은 1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100년 후에도 가을이 오면, 우리는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고, 가을이란 계절이 있는 한 브람스의 음악은 영원할 것이란 사실이다. 가을은 언제나 우리에게 묻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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