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사람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은원(恩怨)이 교차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자신은 올곧게 살았다고 해도 사회관계가 어디 내 마음같이 되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관계는 어렵다. 17세기 이 땅에 미증유의 전란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년)으로 불리는 청의 조선 침략은 국토의 유린은 물론 명에 대한 사대와 중화 문명을 흠모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청은 조선의 항복을 기념하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게 했다. 조선 조정은 난리가 났다. 조선의 사대부 누가 이 치욕적인 글을 지을 것인가. 국왕 인조는 몇 사람에게 글을 짓도록 명했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불명예를 피하고자 일부러 글을 거칠게 지어 채택되지 않게 했다. 결국 비문의 글은 당대 문형인 예문관 대제학 이경석의 글이 채택되었다. 아마 직책상 부득이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도 전하는 삼전도비문이다.

이경석 '궤장연도'
이경석 '궤장연도'

백헌 이경석(1595~1671)은 왕손이다. 그는 77세까지 장수했으나 산 것이 산 것이 아닌 인생을 살았다. 이경석은 영의정을 역임하며 45년간을 국정에 몸담았던 실리와 실용의 명재상이며 행정가였다. 그는 현종 9년(1668년) 11월 27일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조선시대 관리는 70세가 되면 치사(벼슬 사직)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국가 원로로서 임금이 필요로 하면 계속 조정에 나올 수 있게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임금이 신하를 신임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궤장이란 의자와 지팡이를 말한다. 즉, 연로하여 힘드니 의자와 지팡이를 사용하라는 뜻이다. 이 궤장을 받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대대로 가보로 보존 전승하였다. 이때 이경석은 74세로 궤(의자) 1점과 장(지팡이) 4점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궤장을 하사받으면 기념으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를 궤장연이라 한다. 궤장연에 참석한 인사들은 축하의 의미로 시를 짓거나 글을 지어 칭송하였다.

그런데 이경석은 궤장연에 참석하지 않은 우암 송시열에게 궤장연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 서문이 <영부사이공궤장연서>로 송자대전(137권)과 백헌집(52권)에 수록되어 있다. 서문의 끝에 이런 문장이 있다.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과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장수하고 또 건강하여'마침내는 우리 성상의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송자대전)

문장을 평이하게 읽으면 송시열이 이경석의 공덕을 칭찬한 말로 들린다. 그런데 글에서'장수하고 또 건강하여'(壽而康)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다. 요즘 말로'건강하게 오래살았다'는 의미이니 덕담으로 여길 수도 있으나 실은 이 말은 옛 고사를 인용해 이경석의 일생을 비꼬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옛 고사란 송나라 흠종이 금나라에 붙잡혔을 때 항복문서를 써준 손적을 두고 주자가'절의를 버린 대가로 건강하게 오래살았다(壽而康)'고 비꼰 것을 이경석에게 적용한 것이다. 후에 송시열도 뜨끔했는지 현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에 대한 실토와 변명을 하였다. 송시열의 입장에서는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에서 청 황제를 과도하게 칭송한 흠이 있는데도 궤장연에서 다들 칭송의 글을 지은 것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일 수 있다.

이 <영부사이공궤장연서>는 이경석의 문집인 백헌집에도 실려 있는데, 이경석은 왜 자기를 비꼰 송시열의 글을 문집에 싣도록 했을까? 주위에서 송시열의 글을 싣지 말자고 했으나 이경석이 실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록에는 송시열의 기롱(譏弄) 글로 조야가 시끄러워지자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는데'군자의 사귐은 서로 돕고 의로써 권해야 하는 법이지, 어찌 차마 이전의 잘 지내던 관계를 저버리고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나온다.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

이경석과 송시열의 알력은 당시 성리학적 명분론과 의리에서 서로의 관점이 달라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이 미움과 원한으로 작용하여 사람의 일생을 굴곡지게 한 사례도 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가고 뒤틀린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에도 한 사람의 사감(私感)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 사람이 임종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의 하나가 맺힌 것을 풀지 못하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생을 돌아보면 은원이 얽혀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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