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노근호 경제칼럼니스트·경제학박사

계절의 변화가 뚜렷해지고 성큼 다가온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때면 진한 감동을 준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해마다 이때쯤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은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이 계절에 현재 개봉 중인 '오펜하이머'와 2001년 개봉되었던 미국의 '뷰티풀 마인드'는 이에 부합하는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두 영화는 여러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첫째, 성공적인 실적을 거뒀다. '오펜하이머'는 국내에서는 개봉 2개월 만에 3백만 관객을 동원했고,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는 R등급(성인) 영화 중 역대 흥행 수입 2위에 올랐다. 흥행력은 물론 작품에 대한 극찬과 호평이 이어지는 걸작으로 꼽힌다.

'뷰티풀 마인드'는 2002년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색상을 받았고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100대 영감을 주는 영화 93위에 올랐다. 세계에서 3억 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둘째, 각본은 원작을 토대로 했다. '오펜하이머'는 2006년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원작이다. 문화콘텐츠 플랫폼 예스24에 따르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은 올해 8월 판매량이 전월 대비 16.6배 폭증할 만큼 서점가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뷰티풀 마인드'는 기존 게임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 존 내시의 일대기다. 실비아 네이사의 전기 '뷰티풀 마인드(수학 천재이자 노벨상 수상자 존 내시의 일생)'가 원작이다.

셋째, 당시 촉망받던 두 사람의 굴곡진 삶을 그렸다. 오펜하이머는 1922년 하버드대학 화학과에 입학해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조기 졸업한, 20세기 미국이 낳은 대표적 이론물리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그 피해를 목격한 뒤 핵무기 증강과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그로 인해 조국 미국에 대한 반역자, 정치적 야심가로 몰린 엄혹했던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내시는 1947년 입학 전형을 따로 치르지 않고, 장학생으로 엘리트들이 모이는 프린스턴대학원에 입학했다. 불과 31세였던 1958년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종신교수로 임명됐지만 이때부터 긴 세월 동안 조현병에 빠지면서 그의 탁월함도 묻혔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1994년 노벨경제학상, 2015년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을 수상했다. 아벨상을 받기 위해 노르웨이로 출국했다가 귀국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불운했던 천재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내시의 부고 기사에 '위대한 성공을 넘어 위대한 투쟁의 삶을 살았다'는 제목을 달았다.

두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기록영화라 할 정도로 개인적 서사가 중심이다. 오펜하이머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선택에 깊이 고민한 과학자였다. 그 고뇌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자책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내시는 뛰어난 인재 한 명이 학계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최근 MIT 경제학과 모시 호프먼?에레즈 요엘리 교수가 출간한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게임을 한다(Hidden Games)'는 게임이론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노근호 경제칼럼니스트·경제학박사
노근호 경제칼럼니스트·경제학박사

그런데 게임이론의 대가였던 수학 천재 내시가 찾아낸 최상의 해법은 가까이에 있었다.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영혼 치유를 위해 희생했던 아내 알리샤에게 바친 헌사에서 풀어냈다. '전 소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그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발견입니다. 어떤 논리나 이성도 풀 수 없는 사랑의 신비한 방정식을 말입니다. (중략)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 모든 이유는 당신이오.' 노벨상 수상식장은 긴 여운에 잠겼다.

두 사람 모두 인류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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