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최근에 창덕궁을 두 번 찾았다. 한번은 문화유산 포럼의 회원들과 답사를 갔었고, 또 한번은 학생들과 창덕궁에서 세계유산 관련 현장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갔었다. 창덕궁은 필자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창덕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담당했기에 오랜만에 찾은 고궁은 가을빛에 한층 더 고즈넉해 보였다. 창덕궁은 어떻게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을까?

1997년 12월 창덕궁은 우리나라 두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은 조선의 국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면서 국정을 펼쳤던 무대이며 왕조의 최후를 같이한 조선왕조의 상징 공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성과 함께 자연의 형세에 맞춰 전각을 지어 배치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삶을 조화되게 하였고 풍수적으로 안정되고 풍광도 빼어난 조선다운 궁궐이라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 기준을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태종 5년(1405년 10월 19일)에 완공된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전에도 왕들이 창덕궁에서 주로 정사를 볼 정도로 사랑을 받았던 궁궐이다. 특히,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태종실록에는"창덕궁이 완성되었으니 본궁(경복궁)에는 거처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태종의 단호한 의지가 기록되어 있다. 경복궁의 이미지가 위엄이라면 창덕궁은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속에 궁궐이 들어있는 형국이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역대 왕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비록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되었지만, 창덕궁은 아름다운 조선의 대표 궁궐로 시종일관 왕조와 운명을 같이 했다. 필자가 창덕궁을 방문할 때마다 꼭 들러 감회에 젖는 장소가 있다. 낙선재이다. 궁궐의 아래 동쪽에 있으면서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의 낙선재는 아늑하고 편안하다. 낙선재(樂善齋)란 이름부터가 선을 즐긴다는 의미이니 무슨 아름다운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낙선재는 넓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통칭하는 말이지만, 좁은 의미의 낙선재는 조선 24대 임금 헌종의 서재이며 사랑채를 지칭하는 말이다. 석복헌은 경빈 김씨의 처소이며, 수강재는 순조 비 순원왕후의 처소이다. 헌종 임금은 순조의 손자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즉위 전에 돌아가자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첫째 부인 효현왕후 김씨가 16세로 승하하자 왕비를 뽑는 간택을 실시하였고, 삼간택에는 홍씨와 김씨 두 명의 처자가 올라왔다. 이 중 한 명은 간택을 받아 왕후로 봉해지고 간택을 받지 못한 다른 처자는 평생 혼인을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간택권을 가진 조모 순원왕후는 홍씨를 뽑았고 그녀는 왕후의 지위에 올라 효정왕후가 되었다. 그런데 문틈으로 간택 장면을 몰래 본 신랑 헌종은 간택을 받은 홍씨보다 옆에 있던 김씨 처자가 마음에 들었다. 헌종의 마음을 반영했는지 김씨 처자는 비록 왕후는 되지 못했지만, 후궁의 직첩을 받아 정1품 경빈에 봉해졌고 헌종은 창덕궁 중희당 근처에 자신의 서재 겸 사랑채를 짓고 바로 동쪽에 석복헌을 지어 경빈을 머물게 했다. 이곳이 지금의 낙선재이다. 은애하는 여인을 곁에 두고 싶어했던 임금의 마음이 애뜻하다. 왕후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21세 미남 청년 헌종과 방년 16세 신부 경빈은 낙선재의 봄빛처럼 화사한 사랑을 나눴다. 안동김씨 세도와 민란, 이양선 출몰 등 복잡한 정치 현안에서 벗어나 헌종은 낙선재를 자주 찾았고 둘은 꿈같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 사랑은 600일을 넘기지 못하고 23세의 나이로 헌종이 승하하자 끝이 났다.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던 경빈 김씨는 18세에 궁을 나와 무려 60년을 인사동 사가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다 1907년 세상을 떠났다.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그 후 낙선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순종이 1926년 승하하자 석조전에서 낙선재로 거처를 옮기고 1966년까지 머물렀는데, 1963년부터는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생활하였다. 1989년 4월 21일 비운의 왕녀 덕혜옹주가 돌아가자 그동안 옹주를 돌보던 이방자 여사도 9일 뒤 조용히 운명하였다. 이렇게 왕실 사람들이 사라짐으로써 실오라기같이 이어져 왔던 왕조의 명운도 마감되었다. 현재 낙선재는 왕조의 영화와 비극을 상기하는 장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제국의 황혼이 드리워진 뒤안길을 걸으면서 늦가을 고궁의 정취에 취해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