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2023년 12월 8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이 날이다.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년 동안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가 살았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성우(星雨)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19세 때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 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됐다.

26세 때인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해 주필로 활동하며 '독사신론'과 '을지문덕' 등을 발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한국선도 관련 논문인 '동국고대선교고'를 발표했고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해 민족혼을 되살리는 데에 많이 기여했다.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조사 연구해 '조선상고사'(1915), '조선상고문화사'(1910년대 후반), '조선사연구초'(1924) 등을 집필해 근대민족사학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꿈하늘'(1916), '용과 용의 대격전'(1928) 등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단재는 1928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사건'으로 체포된 바 있고, 그 후 항일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또 체포돼 대련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에 56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한국정부가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고, 1978년과 1979년 사이에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위치한 묘역을 정화하고 이곳에 사당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1992년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 복원해 놓은 기념물 제26호인 신채호 선생 생가가 2002년에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단재 생가 터는 지난 1992년 발굴조사와 고증 후 조성됐고 1996년 그 앞에 동상이 세워졌다.

이어 2015년에는 생가 주변에 홍보관이 문을 열었고, 2019년 서대전시민공원에도 동상이 설립됐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그런데 신채호 선생이 대전에서 태어났음에도 선양사업이 주로 충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도는 2009년에 신채호 선생을 '충북을 빛낸 역사인물'로 선정하고 단재문화예술제전, 단재 학술토론회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청주문화관 4층에 신채호기념관을 설치하고 단재 일대기를 그린 영상은 물론 각종 서적과 사진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또한 단재교육연수원을 설립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43주년을 맞아 대전역 광장에 단재 동상을 세우고 대전역 광장을 '단재광장'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대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도심을 활성화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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