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영식 서원대학교 경찰학부 교수

나의 인생 드라마를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작품이 2018년 '나의 아저씨'이다. 최근에도 다시보기로 정주행을 했고, 틈틈이 명장면을 '다시 보기'하는 나의 최애 드라마이다. 주옥같은 명대사들과 배우들의 명연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명품 드라마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남자주인공(박동훈) 역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얼마 전 고인이 된 이선균 배우이다. 그는 다양한 작품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톱스타였고, 나와는 토끼띠 동갑내기다.

2023년 10월 어느 날, 나의 동갑내기 배우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내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내사라는 것은 범죄혐의 유무를 밝히기 위한 수사 전 단계 절차를 말한다. 혐의가 확정되면 실무상 입건이라는 절차를 거쳐 대상자가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다. 톱스타 였던 동갑내기 배우는 혐의 유무가 확정되기 이전에 내사 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미 유죄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한 온갖 루머가 퍼졌고 경찰의 소환 조사 때마다 포토라인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결국 그는 3차 소환조사 4일 후 극단적 선택을 하였고, 우리는 더 이상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 헌법은 제27조 제4항에서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입건 전 피내사자나 기소 전 피의자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의 동갑내기 배우처럼 수사과정에서 신상정보가 공개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2023년 10월 24일 제정된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약칭: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헌법 상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특정중대범죄 피의자나 피고인의 신상정보 공개를 법제화 했다. 나의 동갑내기 배우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법적 절차에 따른 신상정보 공개보다 더욱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왜 헌법 상 무죄추정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피의자나 피고인의 신상정보를 공개해야 할까?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제1조에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범죄 예방을 입법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공익을 목적으로 대상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특정중대범죄에 해당하고 법에서 규정하는 요건을 모두 갖춘 피의자가 공개의 대상이 된다. 이런 법적 절차와 상관없이 유명인 또는 사회적 주목을 받는 사건이라서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이루어지는 경우 여론 재판으로 수사과정에서 이미 유죄선고를 받게 된다. 현대 형사사법의 기본 이념은 누구나 책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죄 선고 이전에 신상정보 공개로 형벌 이외의 가혹한 사회적 처벌을 받는 것은 정당한지 일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법적 절차에 따라 신상정보가 공개된 사람이나 무법(無法)적으로 공개된 사람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그들의 가족이다. 유죄 선고 이전에 신상정보가 공개되는 사람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고 형제자매이다. 신상정보 공개는 가족들마저 범죄자로 만들 수 있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할 수 있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을 가족으로 두었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처우를 받아도 마땅한 일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확정하고 그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한다. 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부모, 자식, 형제자매를 손가락질하고 눈총을 주는 것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피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나의 입장을 어느 정도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피의자 신상공개 제도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알권리를 '대중의 관음증'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저지른 의심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처벌을 받는가이다. 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명백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부모, 자식, 형제자매에 대한 고려 없이 그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동갑내기 배우의 죽음은 내게 민주주의의 폭력을 생각하게 했다. 법치주의가 만들어낸 '공익'이라는 개념이 개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일반인이건 유명인이건 그 원칙이 달리 적용 되서도 안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가장 완벽하게 지켜질 때 '국민의 알권리'가 '대중의 관음증'으로 치부되지 않을 수 있다. 수사기관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함께 무죄추정의 원칙이 최대한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김영식 서원대학교 경찰학부 교수
김영식 서원대학교 경찰학부 교수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동갑내기 배우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인 그는 '국민의 알권리'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법정에 서는 것을 대신했다. 그 죽음의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형사사법제도는 엄정해야 한다. 그러나 무정하지 않아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늘 새겨야 될 말이다. 더 이상 동갑내기 배우의 연기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이 남긴 메시지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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