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난영 수필가

계묘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이했다. 환하게 빛나는 '자정의 태양'이 아름답다. 자정의 태양은 전통적인 새해맞이 행사인 보신각 타종 행사와 더불어서 하는 새로운 축제이다. TV로 보니 감이 잘 오지 않았으나 시민들의 반응으로 보아 얼마나 거대하고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지 짐작이 갔다.

상기된 얼굴로 새해 소망을 말하던 시민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신우일신의 분위기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사진으로 담아온 '옛 지혜로 함께 꿈꾸는 세상'을 보며, 밤을 지새웠다. 지난해는 많은 사람이 아프고 힘들었다. 나 역시 그동안 따사로운 햇볕에 잘 익어가는 복된 인생이라는 생각을 무색하게 힘든 한 해를 보냈다. 기쁨과 보람된 날보다도 이별, 고통, 슬픔의 날이 많았다. 디스크 환자가 농촌봉사활동 갔다가 사다리를 안고 넘어져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고, 지붕의 서까래가 빠지듯 이별을 고하는 형제들을 보며,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허무, 덧없음에 몸과 마음은 허공을 헤매고 지쳐만 갔다.

12월 끝자락에 대학병원 갤러리에서 마음으로 보고 그리는 사람들의 '옛 지혜로 함께 꿈꾸는 세상' 민화 전시회를 볼 기회가 있었다. 새해가 가까워서일까. 생명과 에너지의 상징인 해, 달, 소나무를 그린 청록 산수화풍의 일월오봉도가 첫밗에 들어왔다. 일월오봉도만이 아니다. 모든 작품이 따뜻한 봄날처럼 화사하여 보는 것만으로 메마른 대지에 봄비가 내린 듯 가슴이 촉촉해졌다. 봉황도, 장생도, 모란도, 화조도, 용책거리 등 밝고 경쾌한 화려한 색감은 우울한 내 마음을 '세상 이치 다 그런 거'라며 다독거려주는 듯했다.

사흘 있으면 '청룡의 해'여서 일까. 청룡이 그려진 오지원 작가의 용책거리에 눈길이 멈춘다. 예로부터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신성한 동물로 여겨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해 왔다. 우리 조상들은 용은 큰 희망과 성취의 상징으로 여겼다.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하였고, 사람이 출세하면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표현했다. 태몽으로 용꿈을 꾸면 태어나는 아기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고, 매우 좋은 수가 생겼다는 뜻으로 '용꿈 꾸었다'라고 했다. 왕실에서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고, 일반인들은 영험한 동물로 섬겼다. 도전과 용기, 희망을 상징하는 청룡은 동청룡(東靑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와 더불어 사신도 중 하나로 매우 신성시 했다. 청룡의 기라도 받으려는 듯 푸른 용의 그림을 보고 또 본다. 청룡의 영감을 받아 비상하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민화는 신분의 구별 없이 우리 민족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중에 의해 태어나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발전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해, 달, 나무, 꽃, 동물 등을 소재로 하여 서민들의 소망을 표현한 미의식과 감성이 잘 표현된 대중적 그림이다. 우리의 의식과 정신문화를 독특한 기법으로 채색해 해학과 익살로 표현한 민족 예술이다,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서민문화답게 관람만으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위안이 된다.

병원 갤러리에서 작품 감상만으로 오랫동안 가슴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돌멩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을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체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지끈거리던 머리도 맑아졌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서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작품을 보고도 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전문 지식은커녕 보는 안목도 없다. 그런데도 기회가 되면 찾는다. 성마른 내 성미를 눅잦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성보다는 힐링할 수 있는 작품, 무거운 등짐을 나누어지지는 못하더라도 힘듦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가슴을 따뜻함으로 채워주면 족하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옛 지혜로 함께 꿈꾸는 세상' 볼수록 정감이 간다. 민화의 상징성과 뜻을 생각하면서 작가들이 보내는 마음을 읽는다. 용책거리뿐만 아니라 민화가 가진 해학성과 강렬한 색상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키워드

#아침뜨락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