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지효 교육부장

1932년 일제강점기, 오창의 한 빈농에서 1남 8녀가 태어났다.

그중 다섯째 딸로 태어난 한 여성은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했다.

당시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1남 8녀의 9남매였으니 보나마나 1남만 학교에 다녔을 수도 있다.

다섯째 딸은 아버지를 졸라 뒤늦게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인 18세에 주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전매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22세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온갖 구박을 받다 결국 젊은 나이에 혼자 됐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까치담배 장사부터 시작해 만물상회를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이 51억을 훌쩍 넘겼다.

여자라는 이유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배우지 못한 향학열과 내 자식을 두지 못한 아쉬움으로 충북대학교 학생 모두를 아들, 딸로 여기며 자신이 모은 전 재산을 기부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난 19일 세상을 떠난 '충북대 할머니, 충북대 어머니'로 불렸던 신언임 여사다.

자연 현상과 한 사람의 죽음을 관계 짓는 것은 억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기에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날인 20일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 22일 영결식 때는 충북대병원에서 발인해 대학 본부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장지로 향하기 전 세찬 눈보라가 쳤다. 마치 그녀를 보내기 싫은 것처럼. 그때 지켜봤던 사람들이라면 '무슨 조화속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 여사의 유족들도 유족이지만 1993년부터 신언임 장학금을 받았던 졸업생들이 빈소를 함께 지키고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했다.

신 여사가 살아 있을때 '어머니 돌아가시면 제가 와서 상주 노릇을 하겠다' 약속했던 졸업생은 신언임 장학금으로 로스쿨을 잘 마쳐 현재는 서울의 한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 졸업생은 신 여사의 비보에 한달음에 달려와 상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들은 신 여사를 '또 다른 어머니,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며 극진한 사랑을 표현했다. 신 여사도 친자식은 없지만 가슴으로 낳은 더 많은 자식들과 함께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신 여사의 영면 소식을 듣고 자신의 SNS에 애도를 표하며 "고인은 가셨지만 장학생들은 고인의 따뜻한 미소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충북대는 신 여사의 이름을 따 '신언임홀'을 만들어 그녀를 기리고 있다.

가까운 충남대도 김밥을 팔아 50억 넘게 학교에 기증한 '정심화(법명) 이복순' 여사가 있다. 충남대도 이 여사를 기리기 위해 '정심화홀'을 만들어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에 활용하고 있다.

또 이란 왕의 주치의로 18년간 '골드핑거'로 불린 이영림 한의사는 모교인 경희대에 1천300억을 기부했다.

이들 말고도 학교에 기부를 하거나 도움을 주신 분들은 더 있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내주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너무도 철저히 투자를 안하고 희생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이영림 한의사도 45년된 옷을 여전히 입는다고 했다.

이지효 교육부장
이지효 교육부장

이렇게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진정한 나눔정신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며, 각박한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이 되기를 바라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