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안세훈 상당교회 부목사

등산 용어 중에 링반데룽(Ringwanderung)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산을 타다보면 때때로 산에서 안개를 만날 때도 있고, 폭우가 쏟아질 때도 있다. 그리고 요즘 같은 겨울에는 폭설을 만날 때도 있다. 링반데룽은 바로 그와 같은 예상치 못한 조난 상황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현상을 뜻한다. 나는 내가 가야할 길로, 목적지로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산을 타는데, 한참을 걸어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같은 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걸어갔는데 또 같은 자리로 돌아오고, 한참을 걸었는데 또 같은 자리로 돌아오고. 바로 이것을 '링반데룽'이라고 말한다.

오래 전에 이 '링반데룽'이라는 제목을 가진 짧은 단편 분량의 독립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에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당한 한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부상을 당한 채로 텐트 안에서 깨어나는 그를 친구 둘이 걱정스럽게 맞이한다. 그리고 다정하게 다친 주인공의 탈골을 맞춰주고, 무릎의 고름을 빨아낸다. 친구들의 따뜻한 돌봄 덕에 주인공은 이내 편안히 다시 잠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된다. 텐트 안에서 다시 깨어난 주인공에게 친구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당황한 주인공이 저항하고 화를 내보지만 친구들은 그 모든 주인공의 태도를 무시하고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탈골을 맞춰주고, 고름을 빨아낸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주인공의 눈에는 이제 더 이상 다정함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또 반복되는 상황. 친구들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친구들은 귀신일까? 아니 친구들이 귀신인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친구들도 주인공도, 지금 이 지독하게 반복되는 악몽 속에 갇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달라지는 것은 주인공이다. 계속 반복되는 링반데룽의 상황에 주인공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벗어날 수 없이 같은 자리만을 맴도는 절망이 주인공을 잠식해 버리고, 영화는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를 짧은 단편의 분량 안에 담백하게 담아낸다.

영화가 그려내는 벗어날 수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공포를 우리 모두가 경험한 적이 있다. 지난 코로나의 기간 중 누군가가 일간지에 이 '링반데룽'을 코로나의 일상에 빗대어서 칼럼을 쓴 걸 본 적이 있었다.코로나의 기간, 우리들은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코로나의 상황 때문에 링반데룽의 현상을 느끼면서 살았다. 대면 관계가 소원해지고 모든 것이 위축된 상황에서 그래도 나름 나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열심히 사는데, 매일 눈을 뜰 때마다 힘을 내보자고 그래도 해보자고 최선을 다하는데, 자꾸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상황 말이다. 그래서 걸어도 걸어도 가도 가도 무언가 나아지는 것 없이 그대로인 것만 같은 일상. 그러다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이 자꾸 지치고, 힘도 자꾸 빠지는 것이다. 살아갈 의욕이 떨어지고 차오르는 낙심과 절망에 잠식 당해버리는 것이다.

안세훈 상당교회 부목사
안세훈 상당교회 부목사

2024년 새해를 맞이한 지 어느 덧 한 달이 지났다. 올 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는 새로운 일을 기대하고, 또 누군가는 중요한 변화를 계획했으리라.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 시작하는 나의 발걸음을 돌아보자. 지난 한 해, 또 계속되는 내 인생에서 반복되는 문제와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 해를 시작했는데도 아직도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 감각을 잃을 것 같고, 계속 열심히는 사는데 같은 자리만 맴돌고 나만 이대로 인 거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 새 해 우리 모두가 링반데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시간 동안 지독히도 반복되던 링반데룽에서 벗어나 이제는 우리 인생에 새로운 길들이 펼쳐지고, 반복되는 일상에 소망이 꽃피우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올 해 우리 사회에서 펼쳐질 많은 일들이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링반데룽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 차오른 무기력과 절망이 새로운 우리의 발걸음 뒤로 물러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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