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사람의 삶에 대해 생로병사라는 말이 쓰인다. 삶을 압축해 표현하는 말로서 거의 비판 없이 타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누구나 똑같이 생로병사의 경로를 밟지는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경우도 있고 잘 사는 경우는 생로사, 생병사도 있다. 평균적이고 보편적으로 볼 때 생로병사라는 말은 적절할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단절로 보느냐 연결로 보느냐, 우열로 보느냐 차이로 보느냐 등 수많은 갈래의 사유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연결로 보고 있으며 우열보다는 차이로 본다. 그렇다고 상대주의에 빠져 인간의 독특함이나 인간만의 특성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저런 생각 속에 산을 오르다가 새들에게 눈길이 갔다. 새나 개울의 치어, 야생 세계의 동물들에게 생로병사를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일단 아닐 것 같았다. 동물은 생사일 듯했다.  물론 동물들도 늙음과 병에 민감하며 나름대로 대처한다. 가령 소와 염소는 원추리와 고사리 등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늙음과 병을 인간만이 체계적, 제도적으로 관리한다는 차원에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있다. 대체로 볼 때 동물에겐 생사, 인간에겐 생로병사가 타당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동물 중 하나이며 그 중 특수하게 진화된 종이라고 친다면 인간의 운명은 생사에서 생로병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늙음과 병 즉 노화와 질병에 대한 관리가 인간의 삶과 문명에서 핵심 중 일부일 것이다. 

노화에 대해선 진시황의 불로초 등 무수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질병에 대해선 약국, 병원 등 관련된 것만 주변에서 숱하게 볼 수 있다. 원시 주술 치료, 민간 요법, 양약, 한약 등 방법도 수두룩하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섭생법도 있고 요가, 단전호흡, 무술 등 그 방법들도 무수하다. 외연을 넓히자면 의료보험, 임상 치료 등 수많은 연쇄가 생긴다. 

동물 내지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들 너무 과한 거 아냐? 이런 시각이 가능하다. 약에 대해서만 보더라도 어떤 약들은 동물에 대한 폭력이다.

이처럼 노화와 질병에 대한 관리는 문명을 이루는 요소들로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류는 동물과 달리 문명을 만들었다. 문명에는 인간에 대한 폭력 뿐 아니라 동물, 식물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폭력이 깃들어 있다. 노화나 질병을 관리한다는 것. 그것은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어둠 역시 들어 있다.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이 노화와 질병을 관리하고 문명의 중요 요소로 삼을 때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다. 코로나의 경우만 봐도 자명하다. 박쥐까지 요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로 상대적이지만 인간의 욕망이 지나치게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과도한 욕망이 박쥐에게 희생을 주며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인간 더 나아가 뭇 생명체와 환경 즉 자연의 관계는 근본적인 성찰이 절실하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정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며 나머지 생명체들을 도구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 파괴에 이르렀고 결국은 인류의 멸망까지 가능하다. 생사에서 생로병사의 문명을 일군 인류는 스스로 지은 업에 의해 이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노화와 질병, 그에 대한 관리 문제는 과학과 의료 등 제반 영역에서 놀라운 성과를 빚었음이 틀림없다.
 

이명훈 수필가
이명훈 수필가

문제는 인간의 오만과 과도 욕망, 무절제, 자아중심 사고 등이다. 인류가 생사의 기로로 다가가는 시점에서 생사와 생로병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탐구할 필요가 있다. 생로병사를 해체적으로 해석, 비판함으로써 중요한 새로운 사유들이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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