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성범 수필가

며칠전이었다. 지인분과 오전에 운동을 같이한 후 점심식사를 나누고는 머리도 식힐겸 오랜만에 중,고때 소풍지로 자주 왔던 제천의 9경인 탁사정을 찾았다. 이곳은 자연발생지로 풍광이 보기드물정도로 사시사철 나름대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 탁사정은 조선선조 19년 제주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귀향하며 해송 8그루를 심고 그 일대를 팔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아들 임학운이 정자를 지어 팔송정이라 이름하였고 후손 임윤근이 1925년 허물어진 정자를 다시 세웠고 의병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새삼 정자와 소나무 그리고 계곡을 허리삼아 휘도는 강물이 한폭의 수채화로 장관을 이룬다. 지인들과 얼마동안의 시간을 보낸후 다시 차를 몰아 오는 길에 불현 듯 도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우리가 어렸을 때 물레방앗간이 생각나서 차를 세우고 그곳을 찾아내려갔다. 무심한 세월의 탓인지, 문명의 이기탓인지 주변에는 잡초만이 그 방앗간을 지켜주고 있었다.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도 아주 다행인 것은 비록 초라하지만 그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고 간판에 이곳이 방앗간이였다는 흔적을 볼 수 있을 만큼 '방아' 라고 쓰여진 글자는 오랜 세월을 잘 버티고 지금까지 붙어 있음에 속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쓰린가슴을 조금은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 간판을 보며 마음속으로 대견해 하기도 하고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 방앗간은 우리네 삶의 체취를 잘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여기에 우리에 삶의 애환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는 온 식구들이 하얀이밥을 마음놓고 먹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저녁이면 온가족이 소반에 둘러앉아 밥과 죽으로 끼니를 해결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 웃음꼿은 피어났고 또 다른 내일을 꿈꾸며 하루 하루를 감사로 갈무리 했다. 힘들었지만 행복도 했다. 그런데 이 물레방앗간은 특별한 사연을 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춘기때에는 이곳이 유일한 사랑나눔터였기 때문이다. 중고시절에 남녀학생들이 수많은 사랑탑을 쌓던 곳이리라. 지금처럼 개방된 사회도 아니요,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사랑을 표현할 장소도 딱히 없었던 터라 저녁을 먹고 밤이 짙어갈 무렵 청춘남녀들은 부모님들의 눈을 피해 집에서부터 숨을 죽이며 몰래 몰래 한발자국씩 집을 나서 이곳 물레방앗간 뜰녘 조그만한 의자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세며 환하게 떠오르는 달빛을 조명삼아 마냥 부푼 꿈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바닷가의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참으로 설레이는 마음으로 꿈의 날개를 펼치곤 했다. 그러다 밤이 깊어질 것 같으면 부모님께 혼이 날까봐 아쉬움을 남긴 채 내일을 또 기약하고는 두려운 마음으로 살며시 집으로 돌아오던 추억이 뇌리를 스친다. 생각해 볼수록 이곳이야말로 청춘남녀가 사랑의 향수가 깃들인 곳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도향의 물레방아 라는 소설에도 이런 글구가 나온다, 어떤 가을밤 유난히 밝은 달이 고요한 이 촌을 한적하게 비칠 때 물레방앗간 옆에 어떤 여자 하나와 어떤 남자 하나가 서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었다고 말이다.

이성범 수필가
이성범 수필가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이 갈수록 지나온 것에 대한 진한 그리움에 사뭇치곤 한다. 거기에는 선현들의 손 때묻은 삶의 체취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는 우리네 삶의 역사요,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무슨일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기에 어쩌면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이 물레방앗간 정미소는 역사의 장이 될수 도 있을 것이다. 한참동안 지인들과 사라져 가는 물레방앗간 정미소를 다시금 보면서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떠나는 심정으로 차를 돌려야 했다. 내내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그곳이 가슴을 짓누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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