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째깍째깍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보기만 해도 이름을 알 수 있는 꽃. 시계꽃 구조는 봐도 봐도 신기하다.

우주를 닮은 듯한 원형에 들여다볼수록 꽃술이 독특하다. 꽃은 오전 10시경부터 펴지기 시작하여 시침 방향으로 꽃잎이 한 장씩 펴진다. 꽃은 하루만 지속되며 오후에는 다시 접힌다. 처음 꽃을 보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 정교할까. 시계의 문자판 같은 자주색 부화관 위에는 수술이 5개, 씨방을 이고 암술대는 세 개로 갈라지는데 시침과 분침, 초침인듯하여 꼭 시간을 지나는 중인 거 같았다.

삶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달력의 숫자가 달라지고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감은 인생의 흐름 속에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나를 되돌아보고 새해 소망을 품어보게 된다. 시간은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을 살고 있다. 연보랏빛 시계꽃은 시계꽃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하루살이는 하루라는 생체시계로, 나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살고 있다.

가끔 이 세상은 시계초처럼 정확히 움직이는 공간 속에 시간이 침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마침 우리가 만난 것이 마치 필연을 가장한 우연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분침과 초침이 겹치는 그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것. 지난여름 수생식물원에 같이 간 일행이 시계초를 보며 함께 같은 시간에 있었다는 것처럼….

부모님은 가고 없는 시골 빈집에 괘종시계가 있었다. 크지도 않고 적당한 크기에 사람은 없어도 시간만 되면 추를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시침과 분침이 정시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데, 요즘처럼 세련된 소리가 아닌 둔탁한 저음을 냈다.

시골집 마당을 질러 뜰에서 거실 문을 열면 정면 벽면에 괘종시계가 보이고 그 옆으로 액자들이 있었다. 액자에는 부모님 약혼 사진이나 우리 어렸을 적 사진이 빛이 바랜 채 꽂혀 있다.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 액자 속에서 언제 꽂아놓은 줄도 모르게 오래된, 그래서 추가로 사진 한 장 놓고 싶으면 유리 안으로 못 들어가고 액자 가장자리에 찔러 놓았다.

요양원에서 돌아오지 않는 집주인 대신 시계만이 시간을 알려주는 햇수가 오래 걸렸다. 그러다가 집주인이 바뀌자, 괘종시계는 새로운 주인에게 시계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했어도 새 주인은 단순한 모양의 괘종시계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시골집 괘종시계가 시간은 흐르며 없어진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째깍째깍 초침이 시간을 지운다.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온 시간은 기억으로 남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종류로 나누었다. 크로노스는 시계나 달력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객관적 물리적 시간이지만 카이로스는 주관적 심리적인 시간의 경험과 타이밍을 강조한다. 크로노스의 일정과 정확성보다는 카이로스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여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괘종시계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갔다면 가족의 일생을 기억하는 괘종시계는 내가 보기에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가족의 일생을 기억하는 괘종시계와 덩굴손 감아올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꽃시계에 물어본다. 지금 내 인생의 시계는 몇 시이며 잘 돌아가고 있는지. 크로노스나 카이로스 시간도 아닌 시간의 바깥에서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무심한 시계꽃은 답이 없다. 다만 괘종시계 초침만 들릴 뿐.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꽃이 피는 시간과 사람의 시간은 얼마나 다를까.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꽃이 피듯이 시간의 테두리 바깥일지라도 남은 내 인생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날이 올까.

시간의 바깥에서 오늘 지금이란 시간에 꽃을 심고 가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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