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효진 수필가

특별히 살 건 없다. 만날 사람도 없다.

그래도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구경을 가고 싶다.

바퀴가 달린 시장 가방을 끌고 봄기운이 감도는 하천가를 따라 걸으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다.

물가의 버들강아지는 추위를 뚫고 하얀 솜털을 보송송 내밀었다.

햇살은 빛나고 시냇물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오리가족은 좋은 일이 있는지 물장구를 치며 몰려다닌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시오리 길을 걸어 오일장엘 갔었다.

엄마는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베어 도톰하게 묶고 텃밭에 심은 아욱이며 시금치를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장엘 갔다.

엄마가 식당을 돌아다니며 채소를 파는 동안 나는 엄마가 사주고 간 번데기를 먹으며 장 구경을 했다.

가위를 쩔걱거리며 엿을 파는 엿장수의 재미있는 노래도 듣고, 옥수수 튀기는 걸 귀를 막고 구경하다가 뻥 소리가 나면서 땅바닥에 쏟아지는 뻥튀기도 주워 먹고.

그렇게 신명이 나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우리 엄마를 만났다.

엄마가 채소와 바꾼 돈으로 조개젓을 사면 발갛고 새콤하게 무친 그 통통한 조개젓이 빨리 먹고 싶어서 얼른 밥 먹으러 집에 가자고 엄마를 잡아끌었다.

그러다가 산모퉁이를 돌고 집이 가까워지면 동생들한테 빼앗겼던 엄마를 독차지하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가자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함께여서 흙먼지 날리는 시오리 길을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따라 다녔다. 우리 엄마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어제는 엄마와 다투었다.

나는 허리가 아픈 엄마가 딱딱한 침대에서 자면 안 되니 좋은 침대를 새로 사드리겠다고 했고, 엄마는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비싼 침대를 사느냐면서 펄쩍 뛰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언성이 높아지고 엄마는 돈밖에 모른다고, 그 돈 아껴서 죽을 때 가져갈 거냐고 난 화를 냈다.

하긴, 그렇게 알뜰히 살았으니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우리 칠 남매를 탈 없이 키워냈겠지.

사준다고 해도 난리라며 뽀로록 화를 낸 내가 야속하다. 다 자식 돈 안 쓰게 하려는 엄마 마음인 줄 알면서, 말대꾸를 하지 말걸.

어릴 적엔 그렇게 좋았던 엄마인데, 엄마와 단둘이 있으면 마냥 행복했었는데…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화사한 봄꽃들이 즐비한 입구엔 꽃보다 더 예쁜 웃음이 넘치고, 봄나물을 몇 무더기 신문지에 올려놓은 허리가 구부정한 이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모처럼 옷을 차려입은 촌부들은 파전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고, 낮술에 얼굴이 불콰해진 남정네를 끌고 가는 아낙의 쫑알대는 소리가 들린다. 젊잖게 뒷짐을 진 노인들은 한약재 앞에서 서성거리고 옷가게 앞에서는 여인들의 손길이 바쁘다.

'골라 골라 마지막 기회' 손뼉을 치며 신발을 파는 총각의 모습이 흥겹다.

'왔어요, 왔어. 현지에서 직접 가져온 맛있고 싸게 파는 곶감이 왔습니다'

곶감을 실은 트럭에선 뒤질세라 노랫소리가 우렁차다.

노오란 움파가 꽃처럼 이쁘게 놓여있고 긴 줄을 선 천막 안에는 풀빵을 파는 여인의 기름 바른 손놀림이 분주하다.

살 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속이 출출해질수록 마음이 바뀐다.

얼갈이배추를 보니 겉절이를 해서 칼국수와 함께 먹으면 기가 막힐 것 같고 버섯을 보면 비빔밥을 해서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이것저것 사다 보니 시장 가방이 묵직하다.

조금 뒤에 침대가 배달될 거라는 전화를 받고 엄마가 좋아하는 물미역이며 포기상추 마른김 등 엄마한테 갖다 드릴 보따리를 따로 챙긴다.

늙어서 혼자 산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내 몸 아낄 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허망할까.

오늘은 엄마하고 정말 잘 지내야지.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김효진 수필가
김효진 수필가

묵직한 시장 가방을 끌고 개울을 따라 걷는다.

하얀 새 두 마리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다가 물가에 내려 장난을 친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봄 노래가 흥겨운 장날 오후였다.

키워드

#아침뜨락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