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 국난상황 겨울철 천도… 5대 국왕 64년 역사 품은 '백제 중심지'

공산성 스카이뷰(구글 어스)와 트래킹도. / 조혁연
공산성 스카이뷰(구글 어스)와 트래킹도. / 조혁연

 

공산성 트래킹 고도표.  조혁연
공산성 트래킹 고도표. 조혁연

위치: 충남 공주시 금성동 53-51
출발지: 공산성 주차장(금성동 17-1)
초축: 백제 웅진 천도 이전
형태: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식
둘레: 2,660m(최고 높이 134m)

[중부매일 조혁연 기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의해 고대 한반도의 2백년 전쟁이 촉발됐다.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국가는 백제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 왕성인 한성(漢城 ☞)을 공격하면서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군사에게 비참하게 피살됐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 아래로 보내 죽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개로왕 아들 문주왕은 나제동맹(433)에 따라 신라 구원병 1만명을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부왕은 살해되고 왕성은 폐허가 됐다. 그는 얼마나 급했는지 그해 겨울철(음력 10월)에 도읍지를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의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겨야 했다.

■ 공산성의 역사적 사건


◇웅진백제 시작

공산성 만하루(좌)와 연지(蓮池). 2023년 홍수 때 금강이 범람해 만하루 지붕까지 물이 올라왔다.
공산성 만하루(좌)와 연지(蓮池). 2023년 홍수 때 금강이 범람해 만하루 지붕까지 물이 올라왔다.

금강을 자연 해자(垓子)로 삼은 웅진성은 문주왕 천도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계는 '문주왕은 재임기간이 3년으로 짧았고, 정정이 불안해 성을 새롭게 쌓을 여력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웅진성은 동성왕(東城王) 때 크게 수리를 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웅진성은 문헌상 고려 고종 때부터 공산성(公山城)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몽골 침입으로 당시 공주 일대 백성들이 대거 공산성으로 피신했으나, 농성(籠城) 기간이 길어지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당시 공산성에 함께 들어가 있던 군현의 백성들 중 양식이 떨어진 먼 곳에서 온 자들 가운데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매우 많아서 노약자들의 시신이 골짜기를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려사』 세가, 고종 42년(1255) 3월>

◇ 지명 '공산성'

공산성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금강.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공산성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금강.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공산이 한자 '公' 자와 같은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 단순히 '공주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 등 두 가지가 존재한다. 전자는 이중환(李重煥, 1690~ 1756)이 『택리지』에서 주장했다.

'고을 북쪽에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서리고 얽혀서, 모양이 '公'자와 같아 고을 이름이 공주라는 것은 이 산 때문이다. 산세를 따라서 작은 성을 쌓고 강을 해자로 삼아, 지역은 좁으나 형세는 견고하다.'

공산성의 어근이 된 공주(公州)는 이른바 '곰'계 지명으로 곰나루, 곰고을, 웅진과 친연성이 있다. 일부 어문학자는 이중 곰고을이 곰주(州)로 불리다가 공주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의 별칭인 공주산성, 공산산성 등의 지명도 여기서 생겨났다. 후자가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산성은 이른바 백제의 두 번째 남천(南遷) 후 64년간 왕성으로 기능했다. 이 기간 동안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등 5명의 군주가 백제를 통치했다. 주요 역사적 사건은 <표>와 같다.

◇성왕이 서천한 배경은

538년 성왕은 도읍지를 사비(지금의 부여)로 이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했다. 이른바 백제의 서천(西遷)이다. 성왕의 천도 배경에 대해서는 ①금강 하구 유역의 기름진 평야설 ②서해 진출설 ③정치적 반대 세력을 떼어놓기 위한 설 ④잦은 수해설 등이 존재한다. 이중 ④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금강은 웅진 백제기 동안 적어도 3번 이상 크게 범람했고, 그때마다 공북루 등 공산성 저지대가 침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13년(491) 여름 6월에 웅천(熊川)의 물이 불어서 왕도(王都)의 2백여 가(家)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3년 6월>.

공산성 정문격인 금서루 입구에는 비석군이 위치하고 있고, 이중에는 제민천(濟民川) 영세비도 존재한다. 영세비에는 대략 '1817년(순조 17) 여름 대홍수로 제민천이 범람하고 교량이 붕괴되자 백성들은 그 수리를 원하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3천여 금이라는 막대한 액수로 백성들에게 거둘 수 없는 매우 많은 돈이었다. 이에 충청수영의 군자미와 부여·연기의 공전을 합하여 사업의 자금을 겨우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제민천은 금강의 지천으로 공주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1931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것도 그해 7월 금강 범람, 3백70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2023년 7월에도 금강이 범람, 공산성 만하루가 지붕만 남기고 잠기기도 했다.

◇서천 후에도 꾸준히 역사에 등장한 공산성

공산성은 성왕의 사비 천도로 왕성의 지위를 잃었으나 역사의 주요 사건 때마다 꾸준히 등장했다. 822년(헌덕왕 14) 김헌창(金憲昌, ?~822)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공산성을 거점으로 거병했다.

660년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부여 사비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그곳을 탈출, 공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의자왕은 그후 공산성에서 자기가 임명한 부하에게 체포되는 몸이 됐다. 공산성 성주 예식진(&#31152;寔進, 혹은 &#31152;植)은 의자왕을 사비성으로 끌고 가서 나당연합군에게 인계했고, 그 후 당나라로 들어가 일신의 영달을 누렸다.
 

◇탐방후기

공산성은 성인 3천원의 유료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탐방객이 끊이질 않는다. 산성임에도 도심에 위치하고, 공주의 시가지 전경을 360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동에서 서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도 마음껏 가슴에 품을 수 있다.

 

 

공산성내 주요 건축물

4대문 외 연회공간·누각·사찰 존재

공산성 황색 사신도 깃발과 남문인 진남루. 황색 사신도는 무령왕릉 벽화를 재현한 것이다.
공산성 황색 사신도 깃발과 남문인 진남루. 황색 사신도는 무령왕릉 벽화를 재현한 것이다.

공산성 안에는 정문인 금서루, 남문인 진남루, 연회 공간인 임류각, 사찰인 영은사, 군문인 광복루, 동문인 영동루, 누정인 쌍수정, 북문인 공북루, 누각인 만하루 등이 존재한다.

『만기요람』(1808)은 쌍수정을 언급, '쌍수산성의 옛 이름은 공산성인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성안의 두 그루 나무 아래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쌍수라고 이름하였다'라고 적었으나, 근거가 약한 편이다.

유근(柳根, 1594~1627)은 1602년 9월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고, 재임 기간중 이미 '쌍수영청'을 세운 것으로 그의 시문집인 『서경집』에 실려 있다. 그는 이때 석성(石城)으로 대대적인 개축을 했고, 진남루와 공북루도 신축했다.

공북(拱北)이라는 건축명은 공산성 외에도 청주읍성의 북문, 고창의 모양성 북문, 전주성의 북문 등에도 붙어 있다. 그만큼 보통명사화 된 표현이다. 공북은 『논어』 '덕으로써 다스림은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되 뭇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는 문장에서 유래했다.

유근은 공북루를 짓고 나서 '공북루성(拱北樓成)' 제목의 칠언율시 한시를 현판에 새겼다.

'높은 용마루 새로 펴서 성에 처음 올리니 / 만고에 금빛 흘러 신령이 고을 지켜주네. /

소동파의 붉은 벽이 이제는 푸른 벽이니 / 유양의 남쪽 누각이 무릇 북쪽 누각이네. / 호수와 산에 사람 있어 응당 절로 깨닫고 / 장강과 한수의 자연 본받아 풍류 차지하네. / 조각 구름 갑자기 보내 비로 시를 재촉하니 / 우리 서로 맑은 술통으로 중양절을 즐기네.'

훗날 공북루에 오른 묵객들은 유근의 한시를 차운해 공산성과 금강, 그리고 공주를 노래했다. 그는 만년에 충북 괴산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고, 소수면 몽촌리 산12-7에 묘가 있다.

 

☞용어설명

한성: 별칭은 위례성이고 정확한 위치는 논쟁 중이다.
아차성: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있다.
우두성: 청양 우산성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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