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선양은 해방직후 민족적 염원서 출발"

〔중부매일 송문용 기자〕"유관순 열사 추모 및 선양은 해방직후 독립지사들의 남북분단 극복 의지에서 비롯됐다"

조한필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 13일 백석대서 진행된'유관순학'특강에서 이같이 밝혔다.

1947년 2월 유관순의 순국사실은 언론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곧바로 독립지사들을 고문·임원으로 유관순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사업회 실무는 유 열사 고향이자 3·1만세운동이 벌어진 천안 병천면 주민들이 맡았다.

당시는 북한에 이미 김일성 공산당정권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남한은 좌우갈등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민족화합을 통한 분단극복이 필요했다. 그래서 온 민족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정신의 기억 소환이 절실했다. 독립지사들은 27년 전 18세 소녀의 옥중 순국 사실이 민족단결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기념비 제막, 영화 제작, 전기 발간 등 기념사업이 그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 전 원장은 "일부 진보계열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유관순 선양작업이 '친일-우익-기독교 계열'의 합작품이 아니라, 온 민족이 필요성을 공감해 이뤄졌다"고 백석대 수강생들에게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1947년 11월 27일 천안 아우내만세운동 기념비 제막식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김구·이시영·한훈 등 많은 독립지사들이 추도사를 보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북이 나뉘고 좌우가 대립하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 순국열사에게 죄스러움을 보이며, 여생을 완전독립에 바칠 것을 맹세했다. 또 유 열사가 호국의 신, 계레의 수호신이 되어 도와주길 기원했다.

그는 "우리는 선열들 정신을 이어받아 이것으로 독립과 건국의 기초를 삼고자 유관순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도다"라고 사업회 목적이 명확히 적힌 발기문을 소개했다. 유 열사 추모 및 선양사업은 결코 한 개인의 영웅만들기가 아니라 민족적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란 얘기다.

조 전 원장은 이런 사실을 2019년 '유관순 발굴 과정의 검토' 논문으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천안에 묘가 있는 박문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백석대는 2002년 유관순연구소를 창립하고, 2021년 '유관순학'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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