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경란 청주기록원장

여행가, 화가, 댄서, 스위머, 요리사, 작가 .

봉미 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들이다.

어린 시절 힘든 형편 탓에 하고픈 공부를 하지 못했던 봉미 언니는 이제 하고팠던 모든 걸 마음껏 하는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 세계여행 다니고, 그림 그리고, 춤추고, 수영하고, 요리하고, 글 쓰면서.

올해 일흔여섯 어르신을 내가 다소 건방지게도 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어떤 젊은이보다 젊게 생각하고, 젊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봉미 언니를 알게 된 건 청주기록원이 지난해 진행한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Highlight)를 기록하는 나의 하이라이트(High Write)'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자신의 인생을 담은 사진으로 기록집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많은 참여자 중에서도 봉미 언니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30대부터 50대까지가 대부분이었으니 70대 최고령이라는 점이 눈에 띄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돋보인 건 뜨거운 열정이었다. 매시간 진지하게 임하며 사진 한 장, 한 장을 고심해 고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 마지막 회차에 참여자들의 사진과 글을 엮은 기록집이 책으로 발간되고 성과 공유회 겸 출판기념회가 진행됐는데 봉미 언니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의외의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한 언니의 이 말에 깜짝 놀랐지만 이어진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지난 세월이 너무 모질고 아파서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껏 어린 시절 슬픈 기억을 애써 잊으려 억지로 기억을 꾹꾹 누르고 살았노라고. 그런데 딸의 강권에 못 이겨 신청을 하게 됐다고.

그런데 지난 세월을 사진으로 돌아보고 기억을 되살리며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치유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더라고 언니는 고백했다.

모질었다고만 생각했던 지난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마치 거친 비 내린 후 무지개 뜨듯이. 그런 생각이 들어 내면의 깊은 곳에서 윤슬이 비치는 느낌을 받았노라고.

그래서 지어낸 작품 제목은 '지나고 보니 무지개가 피었습니다'. 언니의 이 고백에 참석자 모두가 눈물지으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봉미 언니뿐만이 아니다.

기록하면서 기억을 되살리고 내적 치유를 경험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한 참여자는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옛 사진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는데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께 큰 사랑을 받은 걸 알게 됐다고, 이제 좀 더 추억이 풍성해지고 단단한 삶을 살 용기가 생긴 걸 느낀다고도 했다.

이경란 청주기록원장
이경란 청주기록원장

또 다른 참여자는 부모님을 초대해 어린 시절 사진을 함께 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인내와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 행사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기록에는 이런 힘이 있다. 오늘, 그리고 지금이 힘든 이가 있다면 오래돼 잊힌 사진첩을 꺼내 보길 권한다. 작은 기억 한 조각이 지금의 당신을 작지만 힘차게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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