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병연 수필가

지구상 80억 인구 가운데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개성과 특성을 심리학용어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한다. 자아, 자아정체성(自我正體性)이라고 번역한다. 에릭슨(Erikson)에 따르면 청소년기(12살부터 18살까지)에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엄마의 손길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인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학교폭력은 '아이덴티티' 형성에 심각한 문제로써 학부모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 나에게는 중학교 입학식과 더불어 쓰라린 추억이 있어서 외손자에게 들려주었다.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1년 동안 농사일을 했다. 새벽에 눈비비고 일어나 지게를 지고 밭에 가노라면, 중학생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저도 중학생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에게 매달린 끝에 이듬해 진학할 수 있었다. 1960년은 4·19 학생의거가 있었던 해이다. 4월 5일이 입학식 날이다. '나도 이제 중학생이 되는 거다!' 며칠 전부터 잠이 오질 않았다. 새벽밥 먹고 한 살 아래인 4촌 동생 '병구'와 함께 걷는 20리 길이 꿈만 같았다.

입학식이 끝나고 '병구'와 함께 영동하천 뚝방길을 걸어가는데 "야 촌놈! 웬 촌놈이냐?"라며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었다. 우리는 못들은 척 묵묵히 걸어갔다. 반응이 없자 사촌동생에겐 관심이 없고, 키가 큰 나에게만 옆구리를 찌르고 모자를 잡아당기며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체구로 봐선 어린애들 같이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난생 처음 싸움이란 걸 하게 됐다. 키나 체구로 봐서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왜소한 친구와 싸움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다. 싸움에 전혀 경험이 없었던 시골소년은 '붕'하고 허공에 뜨더니 뚝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만 보던 동생 '병구'는 "형은 어째 그렇게 힘을 못쓰지? '썩은 고주배기' 같아!" '썩은 고주배기'라는 말에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입학 첫날부터 무서운 형극(荊棘)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패배는 고난의 단초가 되어 우리 반은 물론이고 모든 학생들에게 소문이 나서, 나는 '썩은 고주배기' '바보'로 낙인을 찍히고 말았다. 동료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모멸감 때문에,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이나 할까! 어떻게 들어온 중학교인데! 물러선 곳이 없다. 죽어도 여기서 죽자! 사생결단 각오를 하니 새로운 것에 눈뜨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난국은 어떻게 타개할까! 자기성찰(自己省察)이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이덴티티(identity)'를 발견한 것 같았다. '배구부애 들어가 배구선수가 되자'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배구에만 열중하다보니 그 동안의 수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이 씨앗이 되고 자산(資産)이 되어 후일에 대학을 진학하여 체육교사가 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요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유행하지만, 금수저만이 성공하란 법도, 흙수저는 성공하지 말란 법도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저마다의 '아이덴티티'을 어떻게 발견하고 형성하느냐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난 중학교 입학식날 혹독한 체험을 통하여 아아덴티티를 발견함으로써 인생의 지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공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정작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시련과 역경이 아닐까?

김병연 수필가
김병연 수필가

'입학식과 아이덴티티의 발견!' 이것은 지난 3월 중학교에 입학하는 손자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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