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묵 / 청주지방법원 판사

올해로 3년째 소액재판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73년 2월 24일 소액사건심판법이 제정될 당시 소액사건은 소송목적의 값이 20만 원 이하인 민사사건에 국한되었으나 현재는 2천만 원까지 확대되었다. 위 금액이 소액사건의 주된 당사자인 서민들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액재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재판장으로서 항상 진실 규명에 대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재판에 임하고는 있다. 하지만 간혹 진실에 부합하지 아니한 어쩌면 당사자들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당사자들로 하여금 법원을 원망하게 하지나 않았는지 항상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아울러 책임감도 느끼게 된다.

물론 내가 기록 검토를 소홀히 하여 정당한 결론과는 배치되는 오판을 하였다면 이는 국민의 공복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지 아니한 결과가 될 것이다. 어쩔수 없이 ‘입증책임’에 따라 재판을 함으로써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아니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입증책임과 관련하여 후일의 분쟁을 예방하기 위하여 증거를 남겨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를 들어 본다.

김상당과 이흥덕은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사이로서 어느 날 이흥덕이 김상당에게 3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자 김상당은 지갑에서 현금 30만 원을 꺼내 빌려주었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두 사람 사이가 서먹해지면서 김상당은 이흥덕에게 30만 원을 갚으라고 하였고, 이흥덕이 돈을 갚지 아니하자 결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재판정에 출석한 이흥덕은 김흥덕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하였고 이에 재판장은 김상당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는 증거를 제출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상당은 ‘이흥덕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돈을 빌려 줄 때 차용증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것을 목격한 증인조차 없었다’고 대답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경우 돈을 빌려주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흥덕은 김상당에게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다면 이는 진실과는 명백히 어긋나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 역시 판결 결과에 대해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나아가 법원을 불신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흥덕이 김상당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영수증은 따로 받지 않은 채 돈을 갚았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과연 어떻게 판결하여야 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는 돈을 갚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갚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나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그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면 갚았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소송에서 패소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바, 이를 법률용어로 “입증책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에 이끌려 상대방을 신뢰한 나머지 차용증 또는 영수증을 받아 두는 등의 증거확보는 소홀히 한다. 그러다가 막상 소송이 진행되면 증거를 제출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인데 증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막무가내로 따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증거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하면 결국 억울한 판결을 받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차용증 또는 영수증을 받아둠으로써 후일의 분쟁에 대비하는 것이 본인에게 득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국민이 맡겨 준 재판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법원의 입장에서도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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