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박정원 건국대 언어교육원 교수

만취한 개그맨이 잔뜩 혀 꼬부러진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한 때 개그프로에서 유행시켰던 이 말에 담겨진 페이소스는 경쟁지향주의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 사회에서의 높은 자살율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인가 가수, 댄스, 신입사원, 아나운서 등 각종 전문분야의 참가자에 순위를 매기고 생존과 탈락을 정하는 적자생존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중독되어 있다.

사실 나는 최고의 후보자들을 불러다가 그 중에서도 살벌하게 1등과 꼴찌를 정하는 서바이벌식의 프로그램이 싫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탈락자가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 동지의식을 갖고 서로에게 찬사와 박수를 아끼지 않는 그들에게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 한 탈락자들에게 패자라는 잔인한 이름대신 나름의 선전과 독창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또 탈락을 아쉬워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은 탈락을 창피해하기 보다 도전기회에 대해 감사하고 앞으로의 재도전과 패자부활 을 다짐하는 멋진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세상에 영원한 패자가 어디 있겠는가. 박완서의 소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처럼 패자에게도 격려를 해야 더 큰 도전과 부활이 가능할 것이다.

요즘 학교나 사무실의 필수품인 '포스트잇'은 패자부활의 좋은 사례다. 미국 3M사의 화학자 스펜서 실버는 강력접착제 연구 중 하나를 개발했으나 접착력이 부족하고 불안정해서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고 곧 폐기처분 될 뻔 했으나 발상을 전환하여 이 제품은 책갈피와 임시메모용으로 개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한 비누 공장에서 직원의 실수로 가마솥에서 타기 직전 거품으로 버려진 비누 원료는 용도폐기될 뻔 했으나 사장인 후지무라의 아이디어로 패자부활에 성공한다. 그는 거품 같은 가벼운 비누라면 목욕하다 빠뜨려도 찾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에 뜨는 아이보리 비누를 개발했고 이로서 비누시장을 보기 좋게 강타했다.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등 현재 미국 영화사의 주류인 대부분의 기업이 밀집해 있는 '꿈의 공장' 헐리우드도 패자부활전의 성공 케이스이다. 에디슨의 모션픽쳐스 페이턴트 컴퍼니 조합의 횡포를 피해 LA 할리우드로 옮긴 가난하고 힘없는 독립영화사들은 이 곳에서 오합지졸의 불명예를 멋지게 털고 세계최고의 영화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니 말이다.

감당하기 힘든 패배감을 겪을 때마다 나는 '신은 한 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문 하나를 열어 놓으신다'는 영화 속 대사를 되뇌곤 한다. 내 타고난 재능이 하찮은 것에 비해 이 만큼이라도 이룬 건 패배와 함께 따라 오던 오기와 질투의 힘, '패자의 역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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