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이순신처럼 일하라 ⑪

<1> 이순신 집안은 결코 역적(逆賊)집안이 아니었다!

얼마 전 어느 이순신 연구자가 이순신에 대한 색다른 주장을 해서 세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이순신이 충남 아산으로 이사 왔을 무렵, 그의 집안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은 사료에 대한 재검증과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이전 연구자들이 간과했거나 고의로 부풀린 역사적 거품을 걷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순신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그 연구자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이순신 집안은 기묘사화로 인해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했다'는 기존 이순신 연구자들의 주장은 과연 옳은 얘기일까?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동안 잘 나갔던 이순신 집안은 그의 조부 이백록 대에 들어와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백록이 정암(靜庵)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다가 기묘사화에 얽히는 바람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그 여파로 그의 부친 이정(李貞)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순신은 조부의 역적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의 4형제(희신, 요신, 순신, 우신)들도 문과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사위가 되는 바람에 처갓집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0년 가까이 무과 준비에 전념할 수 있었고, 마침내 무과 시험에 급제했다'고 말했다.



이들 얘기는 이제 국민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주장이 모두 진실일까?

우선 이순신 집안의 족보부터 살펴보자.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字)는 여해(汝諧)다. 덕수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풍 인근의 덕수현을 가리키며, 현재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덕수리로 되어있다. 덕수 이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이며, 그는 관직명이 시사해주듯이 무신(武臣)이었다.

이순신은 이돈수의 제12대 손으로, 그의 선대를 정리하면 제2대 이양준(李陽俊), 제3대 이소(李昭), 제4대 이윤번(李允蕃), 제5대 이현(李玄), 제6대 이공진(李公晋), 제7대 이변(李邊), 제8대 이효조(李孝祖), 제9대 이거, 제10대 이백록(李百祿), 제11대 이정(李貞) 순으로 요약된다.

이순신 집안은 조선 초기부터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종래의 무신 집안에서 문신 집안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그의 제7대조 이변의 변신이 가장 눈에 띈다. 이변은 세종 1년(1419년)에 문과 급제한 후, 성균관 대제학을 거쳐 성종 때에는 정1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특히 성균관 대제학은 조선의 학문을 대표하는 자리로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직책이었다.

이변의 손자 이거도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장령을 거쳐 병조참의(현 국방부 국장, 정3품)에 올랐다. 그는 연산군 이륭(1476~1506년)의 세자 시절,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연산군 8년(150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거는 강직한 성품과 원칙제일주의로 공직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조정 내에서 '호랑이 장령'으로 불렸던 그의 별명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거의 청백리 정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0여년이 흐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그에 대한 근거는 1597년 1월 27일자 ≪선조실록≫이다. 그날의 ≪선조실록≫을 보면, 유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언급하면서 '그가 성종 때 이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결코 역적(逆賊)행위를 하지 않았다!

기존의 대다수 이순신 연구자들은 '이백록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팩트가 아니다. 나도 이순신 연구 초기에는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신문에다 글을 쓰고 대중 강연도 많이 했다. 이순신의 가족사에 대한 사료 검토에 철저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한편, 이백록은 증조부 이변, 부친 이거처럼 크게 현달(顯達)하지는 못했다. 그는 중종 17년인 1522년 성균관 유생을 뽑는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고, 선대의 음덕에 힘입어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종8품)를 지냈다. 당시 그가 맡았던 업무는 시장(市場)의 제반 질서를 관리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훗날 그는 손자 이순신의 화려한 군공(軍功)에 힘입어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1519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어야 할 그가 1540년에도 멀쩡하게 생존해 있었다는 점이다. 1540년 6월 27일자 ≪중종실록≫을 보면, '...(중략) 평시서봉사 이백록은 성품이 본디 광패하여 날마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거리낌없이 멋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외람된 짓으로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백록이 기묘사화 때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주장은 팩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삭탈관직을 당한 것은 업무수행상의 근무태만에 기인(起因)하며, 기묘사화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묘사화 이후, 이순신 집안은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했다'는 기존 이순신 연구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서 반드시 시정(是正)되어야 옳다.

그러면 기존의 이순신 연구자들이 이백록과 기묘사화를 연루시킬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또한 "이백록이 조광조와 뜻을 같이 했을 만큼 가까웠다"는 그들의 주장도 과연 옳은 얘기일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다음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1519년 풍암공(楓巖公)이 흠모하던 정암 조광조가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인해 화순에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사람들도 같은 당여(黨與)로 몰려 참형을 당하자 서울에 살던 풍암공은 곧바로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은거하다 생을 마치셨습니다. 풍암공의 묘소도 용인의 고기리에 있으며, 풍암공의 생몰년을 모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략)' 이것은 2009년 7월 22일 충무공파 종회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다.

#잘못된 국민 상식은 정직하게 수정되어야 한다!

위 글을 통해 우리는 '이백록은 기묘사화로 인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갖고 있었을 뿐, 조광조를 제거한 훈구세력들의 공격 대상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 이백록은 조광조와 흉금을 털어놓고 시국(時局)을 논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이백록이 조광조를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했을 뿐이다. 종2품의 대사헌 조광조와 종8품의 이백록은 직급 차이가 너무 컸다. 이백록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친근했던 것처럼 기술한 것은 지적(知的)으로 정직하지 못한 자세다.

게다가 '이순신이 문사적(文士的) 재능이 뛰어났지만, 조부 이백록의 역적 행위로 말미암아 문과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주장도 팩트가 아니다. 그는 조부 이백록과 관련해서 어떠한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다. 그가 무과를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본인 의사에 따른 것이며, 조부 이백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얽혀 조광조와 함께 사약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조광조는 선조 즉위 초인 1567년 11월에 신원(伸寃)이 회복되었고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까지 된다. 만약 이백록이 기묘사화 때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역적으로 몰렸다 해도 1567년 11월쯤에는 그의 신원도 회복되었을 것이다.

그때 이순신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시기에 이순신이 문신의 길을 걷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충분히 문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운명적으로 무과 시험을 선택했다. 그는 28세 때 처음으로 무과 시험에 도전했다가 예기치 않은 낙마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낙방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576년에 치러진 식년무과 전시(殿試)에서 병과 4등(전체 순위 12등)으로 급제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 팩트다!



#김덕수 교수는

▶공주대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청주고,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사· 경제학 박사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 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등 16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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