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죄를 지었다는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도 재판 결과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어야 한다는 형사법상의 대원칙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형법전에는 피의사실공표죄가 규정되어 있어서, 검찰ㆍ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하는 것은 처벌하도록 하고 있고, 민사상으로도 무단히 피의사실을 공포한 불법행위에 대하여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범죄자로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인적내용을 언론에 흘려 나라가 떠들썩해지는 사건은 많았으나, 피의사실 공표죄로 수사담당자가 처벌되었다는 이야기나 거액의 손해배상책임을 졌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과거 유명 개그맨이자 사업가였던 이가 강간범으로 기소되어 수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죄임이 밝혀진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무죄로 판명나기 전 수사기관은 그의 실명등을 공표하였고 방송은 민망한 억측을 버무려서 그의 실명을 거론하며 확인된 사실인양 이를 보도하였고, 국민은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 이미 그를 성폭행범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결국 오랜 법정다툼 끝에 그의 죄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폭행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오래동안 TV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 졌고, 전성기가 훨씬지나 어렵사리 복귀한 방송에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사라졌다. 그때도 사석에서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성폭행 개그맨이었다. 그만큼 섣부른 단정이 주는 폐해는 끝이 없다.

어린 시절 반공교육시간에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을 길거리에서 비난하면서 성난 군중들이 그를 벌하는 인민재판을 벌이는 북한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도 괴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보다 더 우려할만한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의 인민 재판에 비해서 첨단 IT기술이 접목되어 그 기록이 널리 그리고 오랜기간 보존된다는 점, 그 사이 다양한 소설이 버무려진다는 점, 그리고 그에 대한 악플이 끊이지 않는 다는 점, 그뿐이다.

한번 인터넷에 범죄자로 실명거론이 되고나면, 의심을 받는 자가 아무리 자신을 변호하여도 그는 순식간에 대중에 의해 명예사형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사건은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종종 발생하여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흔하다.

본인이 일본의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시보로 근무하던 중, 그들의 조심성에 크게 놀란 경험이 있다. TV방송국에서 범죄와 연관된 고발 프로그램 방송테이프를 자문 변호사에 보내서 변호사들이 한 방에 모여 이를 시청하면서 방송 프로그램의 법상 문제점에 대하여 검토를 하고 있었다. 방송테이프에 녹화된 내용의 위법여부를 많은 변호사들이 직접 시청하면서 일일이 확인하는 것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심지어 촬영된 범죄자를 식별할 수 없도록 방송국에서 처리한 모자이크의 정도까지도 검토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과거 TV고발 프로그램에서 일반인의 모습을 방송에 그대로 내보냈다가, 그의 사회적 평가가 훼손되어 그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청구를 당해 해당 방송사가 패소하여 그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대부분의 방송국은 고발성 TV 프로그램을 방송하기에 앞서 손해배상책임을 질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법률 자문을 구하고 있으며, 국민들도 범죄자로 낙인찍는 행위에 대하여 쉽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낙인을 찍는 행위에는 여전히 관대하고, 낙인찍힌 자의 구제에는 눈감고 있는 듯 하다.

선진국은 단순히 그 국가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로 판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의 발달 단계에서 단계적으로 나타나는 홍역을 치르며 그간 간과했던 소소한 부분들에 대한 관심이 사회의 미세한 부분까지 미쳐 잘 정비되고, 대다수 국민의 의식이 바로섰을 때 비로소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물질적 발전만을 근거로 우리나라를 쉽게 선진국이라 부르긴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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