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등학교를 청주로 진학하면서 나의 자립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른 입학 탓에 열다섯 살부터 친척집에 살기도 하고, 자취를 하기도 하면서 복대동, 수곡동, 사창동, 탑동, 가경동을 거쳤다. 그래서 필자에게 자립은 부모님을 떠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내야 하는 그 어느 시기를 말한다.

이젠 부모님 곁에 살았던 시간보다 혼자 살아낸 시간이 길고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내 아이를 자립시켜야 하는 부모가 되어 있다.

얼마 전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중에 아이들이 언제 자립했다고 느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보니 "아이가 결혼했을 때" 또는 "취업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 등으로 자립을 이야기 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자립은 '혼자 생활을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부모님들은 주로 경제적인 독립을 자립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자립의 개념은 '남에게 의지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섬'을 나타낸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고 걷기 시작하면서, 말을 배우고, 혼자 화장실에 다녀오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자립을 준비하는 것이다. 아니, 혼자 목을 가누기 시작할 때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면서 이미 자립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시작으로 전 생애에 걸쳐 자립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지만, 우리 곁엔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또 다시 부모님들께 질문을 해보았다. "장애인이 외출을 하기 위해 두 시간이 넘도록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자립일까? 아니면, 누군가 도와줘서 30분 만에 옷을 갈아입고 외출할 수 있다면 이것이 자립일까?" 강의를 듣던 부모님들은 "두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혼자 옷을 입는 게 자립"이라고 대답한다. 정말 그럴까? 삶의 질을 높이고자 사회복지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라면 이 두 가지 경우 중 어떤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일까?

장애인에 대한 자립은 비장애인과 조금 다르다. 장애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장애 자체를 사회가 인정하고, 장애를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제거하고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두 시간 동안 고생하며 옷을 혼자 입게 하지 않고,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30분 만에 옷을 갈아입고 즐겁게 외출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지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섬'을 정의로 하는 자립의 개념이 장애인에게는 '사회적 지원을 통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는 힘'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제 장애인은 더 이상 치료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사회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장애인의 자립생활이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자립은 좀 다른 개념을 가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시설보호나 가정위탁 등을 통해 사회적 보호를 받았던 아이들은 18세가 되면 자립해야 한다. 만 18세가 되어 시설에서 퇴소하는 아이들에게는 자립정착금 500만 원, 대학에 진학하면 200만 원의 등록금이 지원되지만 사실 이 돈은 전세자금으로도 모자란다. 현실적인 자립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연금공단의 2013년 결산보고서를 보니 정부는 약 2조원의 적자를 국민 세금으로 전부 메워준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이 적자폭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질텐데 계속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2조 원이라는 금액은 소시민으로서 그 규모가 어느 만큼인지 상상도 안된다. 그저 시급 6천412원을 받으며 장애인 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활동보조인의 삶과 500만 원을 들고 전셋집을 얻으려는 열여덟 살 아이의 근심어린 얼굴이 떠오를 뿐이다. 회장님 하루 노역 일당이 5억 원인 세상, 부디 세금이 쓰일 곳에 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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