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박현수 숲해설가

계절은 바람을 따라온다는 말이 몸으로 느껴지는 날입니다. 사직대로로 내려오는 양버즘나무 길은 하루가 다르게 갈색으로 변하고 길에는 영혼처럼 우는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리는 날입니다. 바람을 따라 구루는 낙엽을 바라보다 마음 깊숙이 헛헛해져서 아름다운 색을 일찍 찾아 소백산을 찾았습니다.

소백산으로 오른 길은 햇빛의 아름다움입니다. 낙엽송으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긴 햇살, 개옻나무의 노란빛의 색, 붉나무의 짙은 빨강이 다 빛이 만들어낸 황홀한 자태입니다. 성질 급한 계곡의 당단풍나무는 붉은 잎을 떨어뜨리고 바닥에는 참나무의 갈색 낙엽들이 늦가을 흉내에 바쁩니다.

가을꽃들이 올해 마지막 꽃 잔치를 열었습니다. 길가엔 노란 빛에 달콤한 산국, 선홍빛 꽃의 향유들이 자리를 잡았고 위풍당당한 꽃대를 세운 투구꽃들은 자꾸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작은 꽃들이 모인 산부추와 흰 색도 아닌 분홍색도 아닌 구절초가 황량해지는 숲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비로봉으로 올라 용의 쓸개처럼 쓰다고 붙여진 용담들을 마주칩니다. 보랏빛과 파란빛을 섞은 용담의 꽃은 가을 하늘과 비교할 만큼 아름다운 색을 지녔습니다. 솔방울 혹은 밤송이 같은 수리취의 꽃이 가을바람에 말라 가고 엉겅퀴 중에 특별하게 흰 꽃이 피는 정영엉겅퀴들이 바람을 피해 꽃을 바닥에 피웠습니다. 몇 백 년 된 주목 군락을 지날 때는 경건하고 성스러운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들곤 합니다.

비로봉의 넓은 초원은 구상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간간이 정상 중턱까지 올라온 신갈나무들은 바람을 넘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초원의 길은 가을 하늘로 오르고 혹 하늘은 향해 걸어 올라가는 그런 착각을 불러오게 합니다.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오리는 비로봉입니다. 비로봉에서 비로(毘盧)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준말입니다.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산봉우리를 영험하게 여겨 불계에서 명명한 지명으로 금강산의 최고봉, 오대산의 최고봉, 치악산의 최고봉도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이상 세계인 화엄세계가 있다면 바로 비로봉의 넓은 능선이 아닐까요. 화엄은 철학자 강신주님의 책에 화엄경에 대한 풀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뷔하'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간다'는 온갖 가지가지의 꽃들을 뜻하고 '뷔하'는 화려한 수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간다'는 꽃을 뜻하는 '화(華)'로 '뷔하'는 장관을 의미하는 '엄(嚴)'으로 번역한 말이 됩니다. 따라서 화엄이라는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람을 피해 바위 틈에 숨어 이 절경을 바라봅니다. 하나하나 풀들을 바라봅니다. 바위에 핀 작은 돌양지꽃은 들판에 핀 큰 용담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알기에 생명은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나도 저 들판에 핀 하나의 꽃입니다. 또한 내 주위에 모든 사람들도 같은 들판에 자리 잡은 꽃입니다. 모두 각 각의 모습이 다르고 사는 방법도 다릅니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는데 우린 상상해서 비교하며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풀들도 보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것을 잠재성이라고 말하고 생명의 잠재성은 감히 예상하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할 때 안타깝게도 삶의 주인공인 자신을 자꾸 잃거나 잊어버립니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그렇게 되길 갈망하며 몸은 갖고 있지만 마음이 타인인 삶을 살아갑니다. 지금도 성적, 직업, 소득 등 외적인 것으로 비교하며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소백산 능선에 시기를 잊은 산철쭉이 꽃을 피웠습니다. 아마도 가을볕이 봄 인 줄 알고 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대부분 바보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생명의 열정이 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삶의 주인은 나이기에 삶의 애정과 열정도 내 것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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