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박현수 숲해설가

일월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앙상한 나무들 숲에 울리면 가지마다 쌓인 흰 눈이 부스스 떨어집니다. 올해 어느 생명에게 제 집을 내어 줄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긴 겨울잠에 아직 숲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이월 생명의 숨은 땅에서 시작합니다. 겨우내 자리를 잡던 낙엽의 젖은 몸이 바람에 떨고 나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숲의 비탈 자리에 너도바람꽃이 얼굴을 내밉니다. 땅은 그렇게 이른 생명들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삼월 들판에 작은 꽃들이 피어나면 숲에는 큰 꽃들이 피어납니다. 복수초. 노란 꽃잎들은 이제 숲의 생명들에게 봄을 알립니다. 여기저기 잘려나간 괴불주머니의 줄기에 고라니의 이빨 자국이 겨울을 잘 보낸 생명의 알림이 느껴집니다.

사월 숲의 긴 자리마다 연초록의 빛깔로 채워지면 노랑턱멧새의 울음소리는 더 바빠집니다. 청딱따구리 집 짓는 소리에 나무의 흰 꽃들이 터지기 시작하고 살이 오르는 찔레 줄기는 진딧물을 불러드립니다.

오월 성질 급한 서양민들레의 꽃씨가 솜털처럼 맺히면 곤충들에 바쁜 일정이 시작됩니다. 제비꽃, 애기나리, 솜방망이, 각시붓꽃 갈 곳은 많은데 몸은 하나라서 사람도 곤충도 모두 분주하게 숲으로 옵니다.

유월 생명의 핏줄인 계곡이 점점 제구실을 하고 물속의 곤충들도 제법 어른이 되어갑니다. 곧 밖으로 나와 훨훨 날갯짓으로 푸름이 짙은 숲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숲과 도시를 넘어 뻐꾸기에 온몸으로 우는 사랑 외침이 곧 생명 탄생을 기다리게 합니다.

칠월 숲은 강렬한 소나기에도 뜨거운 무더위에도 아침 햇살에 운무가 넘어가 듯 그렇게 자연스레 보냅니다. 이제 봄의 여린 자락은 사라지고 풍요로운 여름이 시작되면 생명들의 부풀린 모습들로 열정적입니다. 원추리의 꽃대가 숲 그늘에 올라서면 물레나물의 꽃잎이 돌기 시작합니다.

팔월 여름의 숲 속은 매미의 큰 울음소리가 울리는 긴 낮보다 짧은 밤의 축제가 강렬합니다. 반딧불이의 감성적인 조명에 맞춰 장수풍뎅이의 사랑방 주막이 열리고 달달한 참나무 수액에 취한 곤충들의 사랑놀이가 새벽까지 이어집니다. 아침 해장인 칡꽃 향기로 숲은 다시 깨어납니다.

구월 열정적인 숲은 어느새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합니다. 느긋한 풀꽃들은 이제 슬금슬금 작은 꽃들을 내밀고 여름내 즐긴 나무들은 툭하고 여린 열매들을 달아놓았습니다. 아직 뜨거운 햇볕은 늦지 않았다고 몇몇의 게으른 생명들에게 시간을 줍니다. 이제야 도토리에 깍지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시월 숲의 마감시간이 다가와 옵니다. 다시 분주해진 숲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숨을 쉬고 돌아서면 본연의 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구절초의 옅은 보랏빛은 맥이 없는지 강렬한 보랏빛인 투구꽃과 용담의 꽃이 가을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생명들은 생명을 다시 이어가는 자연의 명분을 지키느라 온 힘을 쏟고 나면 사위질빵은 하얗게 머리를 태워 버리고 맙니다.

십일월 숲은 서리가 내리고 곤충들은 자신의 자리를 이미 찾아갔습니다. 몇몇의 늦은 풀꽃들은 아쉽지만 이제 꽃잎을 닿아야 하고 화려한 본연의 색을 찾은 나무들은 자신을 돌아보는 짧은 시간을 남겨놓았습니다.

한 해를 보낸 잎이 떨어지고 미련이 남은 갈참나무 잎은 파르르 찬바람에 투두둑 도토리의 흔적을 찾기만 합니다. 어느새 소나무는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갑니다.

십이월 겨울잠을 들기 싫어하던 푸른 별꽃들은 사나운 눈 회초리를 맞고 노란 빛으로 변해갑니다. 잠들지 못하는 동물들은 제 살길을 찾아 바람에 사라질 흔적을 남기고 나무들은 제 몸을 드러내 겨울을 맞고 서있습니다. 숲은 그렇게 한 해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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